꼬인 생각과 주체적인 생각은 한 끗차이인가?
꼬인 생각인지 몰라도, 아니 꼬인 생각이지.
상대방은 배려한다고 한 말이 오히려 기분을 상하게 할 때가 있다.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없어 나 혼자 속단하지만 또 정말 마음을 알 수 없으니까.
예를 들어 ‘주명아 너 그 서류 가져다줬어?’라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말한 사람은 한 가지 의도로 이야기했을지 모르지만 나같이 생각이 많아 얼키설키 꼬여있는 사람에게는 말이 여러 갈래로 나뉘어 온다.
첫 번째는 말 그대로 가져다줬는지 사실여부를 묻는 질문이고 두 번째는 ‘너 아직 안 갖다 준거 아니니’라는 소극적 추궁을 호의적으로 표현한 질문이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나의 대답은 ‘네 가져다줬어요’다. 나는 ‘어서 갖다 줘’나 ‘아직 안 갖다 줬어?’라는 말이 듣기 싫어서 다시 물어보기도 전에 후다닥 다녀온다.
나를 나무라지 않는 태도로 말하는 것 같지만 그 말은 사실 나를 배려하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니라 묻는 사람 자신의 교양이나 태도를 세우기 위한 말일 수도 있다. 타인에게는 좋은 사람으로 비칠 수 있고 나 자신도 배려의 표현을 사용할 줄 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일종의 자화자찬 언어다. 돌려서 말하는 표현은 따뜻한 온기보다는 치밀하게 설계된 표현일지도 모른다. 사실 내가 그런다.
이런 꼬인 관점으로 직언을 생각해본다면 또 다른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흔히들 ‘뼈 때리는 말’이라고 한다. 말이 살을 파고들어 뼈를 때리다니 보통 아픈 말이 아니다. 나를 미워하고 시기해서 그런다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그런 의도를 가지고 말하는 사람도 수두룩하다.
하지만 우리 자주 들어봤다. 권력자 옆에는 직언을 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사실과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해주는 조언자가 필요하다고. 우리는 내 자신을 내 눈으로 볼 수 없기에 타인의 눈에 비친 나를 알고, 보고 살아야 한다. 그런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게 오히려 감사하다. 나를 지켜봐 주는 이가 있다는 뜻이니까.
사실 들을 땐 불편하고 기분 나쁘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왜 나에게 이리도 올곧은 말을 할까 싶다. 꼭 나와 사랑의 관계로 얽혀있지 않은 업무적 관계에서도 그렇다. 그러나 그 온기 없는 직언에는 다정한 사랑도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내가 더 발전할 수 있도록 돕는 말들은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한 나를 흔들어 깨운다. 정확히 나를 보게 한다. 우리는 내 자신을 똑바로 보는 것이 무서워 피하기도 하니까.
내가 생각한 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 우리는 배신감에 사무친 무기력한 패배자가 된다. 그러나 그 패배감에 사로 잡혀 있으면 나는 여전히 머물러 있는 내가 될 것이고, 물리치면 지금보다는 조금 다른 내가 되어 있을 것이다.
모든 말은 보이지 않는 옷을 입고 있다. 이 보이지 않는 옷을 볼 수 있으면 영리한 내가 될 수 있고, 볼 수 없으면 상대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으면서 휘둘린다.
주체적인 생각을 한다는 것은 상대가 건넨 옷에서 한 부분을 오려 내 옷을 지어 입는 바느질이다. 그대로 입지 않고 나만의 언어와 사유로 다시 재봉한다. 스스로 내 옷을 만들기도 하지만 타인의 세계에서 얻어온 옷감으로 옷을 만든다. 내 사고를 창조한다. 나의 세계는 타인과 결합해서 이뤄지기도 하니까.
이런 생각을 하는 걸 보면 역시 나는 말을 들리는 대로 듣는 사람이 아니라 꼬고 꼬아서 듣는 사람이 맞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