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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앙성 산문 15화

무당벌레(Ladybug)의 추억

(텃밭의 악당 28점 무당벌레는 제외하고)

by 시준

텃밭을 가꾸면서 벌레들을 맨손으로 집어 들어 코앞에 놓고 들여다볼 정도로 익숙해지면 비로소 이쁜 녀석과 나쁜 녀석 즉 피아를 구분할 줄 아는 수준의 벌레학 초보는 되는 것 같다.

풀잠자리, 칠성 무당벌레가 알고 보니 진딧물과 깍지벌레를 잡아먹는 우리 편이라 더 이쁘게 보이고 텃밭 농사에 도움 되는 익충(益蟲)의 대표선수라는 것도 알게 됐다.

점차 농사 절기에 익숙해지면 절기 따라 영지에 출몰하는 다양한 벌레와 곤충들도 자연히 익숙해지고 곤충학적 호기심이 생긴다.


바깥 기온이 급격히 떨어지는 늦가을이 되면 햇살 비치는 2층 화실 창가 위에 어김없이 무당벌레들이 떼로 몰려있다.

창문마다 방충망이 건재하고 창문도 꼭 닫고 지낸 지 한참인데 이 녀석들이 어떻게 집단적으로 실내로 침투해 들어오는지 그 루트를 도대체 알 수가 없다.


붉게 빛나는 화려한 옷을 매끈하게 입고 있는 데다 바가지처럼 둥글고 작은 체구에 도무지 사람을 물어뜯을 것 같지는 않아서 이미지도 좋다. 이 귀여운 생물체를 보고 누군가 굿판에서 춤을 추는 무당의 차림새 같다고 연상을 했다손 쳐도 이름을 그냥 ‘무당’으로 딱 붙인 것이 어째 좀 그렇기는 하다.

미국영어로 레이디벅 (영국에선 Ladybird) 아닌가.

어원이 무려 신이 인간에게 선물해 준 ‘성모마리아벌레 내지는 성모마리아 새’이니 알면 미워할 수가 없는 곤충이다. 그런데도 아직 벌레에 대한 식견이 ‘다 싫어’ 수준인 2층의 화가는 전원생활 첫해의 늦가을에 허락 없이 자신의 공간에 침입해서 우글대는 이놈들을 처음 보고 다른 징그러운 벌레들을 발견할 때처럼 질겁해했다.


비명에 가까운 톤으로 아래층의 평화로운 거주자를 호출하면 즉각 달려가 말없이, 대수롭지 않은 듯한 동작으로 벌레를 집어내 잡아 죽이든지 밖으로 내보내든지 하는 것이 보통의 일상에서 수없이 겪는 작은 벌레 소동이었다. 그런데 무당벌레를 좀 아는 동지적 우호감이 있는 입장에서 무자비하게 즉결 처형이나 추방을 할 수는 없었다.

여기에 무당벌레가 집안으로 들어오면 복이 들어온다는 얘기마저 은근히 믿는 터라,

어떻게든 공존 월동의 분위기를 만들어 보려고 설득했다.

‘좋은 곤충이야. 따듯하게 겨울을 나야 해. 함께 있어도 우리를 괴롭히지 않는다고.’ 하면서

벌레에 대해서만큼은 여전히 완고한 화실의 주인께 영화 속 장면 같은 아득한 얘기를 들려주었다.




무당벌레의 추억. 그때가 79년 가을 전방의 추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어느 때였을 것이다. 산 아래는 대통령의 유고로 어수선하다 해도 우주를 방위하는 노고에 견줄만한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는 우리 분대는 억새로 가득 찬 야산 고지 위 공터에 육각 야영 텐트를 치고 며칠째 주둔하고 있었다. 근무, 휴식과 취침, 보초를 각각 2명씩 4시간마다 돌아가며 선다. 제비 뽑기로 일단 정해진 시간표는 작전이 종료될 때까지 어지간한 사유가 없으면 순서에 변경이 없다.

기온이 갑자기 떨어진 날 늦은 오후 해가 기울 때 저녁 근무에 들어갈 시간이 되어 슬리핑 백 속에서 눈을 떴다.

살짝 열린 텐트 출입구에서 한줄기 강렬한 석양볕이 들어와 어두운 텐트 안을 비추고 있었다. 눈에 비치는 군용 텐트 천정이 황홀한 빛으로 가득했다.

‘뭐야~ 아직 잠이 덜 깬 건가?’

눈뜨면 마주하던 익숙한 흑녹색의 칙칙한 텐트 대신 황금과 호박이 섞인 듯 신비로운 붉고 누런 색채의 장막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안경을 찾아 쓰고 보니 텐트가 살아 움직인다.

일어나 자세히 보니 텐트 안쪽이 무당벌레 등껍질로 빈틈없이 채워져 꿈틀거리고 있었다. 괴기스럽기도 하고 경이롭기도 한 광경이었다. 혼자 보기 아까워 아직 자고 있던 김일병을 깨웠다.

애벌레 집 같은 침낭 속에서 몽롱한 눈으로 바라보던 김일병이 갑자기 팔을 뻗어 야전 침대 밑에 벗어놓은 군화를 집더니 텐트 천정으로 냅다 던졌다.

수천 마리 무당벌레가 짧은 날개를 떨며 어지럽게 날기 시작했다. 석양의 햇살이 무수한 황금 날개에 황홀하게 부서지고 텐트 안 공간은 무당벌레 날개 짓 소리로 가득 찼다. 나와 김일병은 텐트 밖으로 쫓기듯 탈출했다.

밖은 이미 추웠고 해는 땅으로 떨어지기 직전이었다.

무당벌레떼가 다시 텐트 안쪽에 질서 있게 달라붙기를 기다리며 다음 휴식조는 무당벌레와 함께 쉬었다. 고지에 눈이 흠뻑 내려 쌓일 때까지 억새에 이는 바람 소리와 함께 해가 뜨면 텐트를 소리 없이 떠났다가 해가질 무렵이면 어김없이 들어차던 사단급 무당벌레떼와 우리 분대는 평화롭게 함께 지냈다.




그때의 수천~ 어쩌면 수만 마리 무당벌레떼에 비하면 수십 마리 정도의 무단 체류는 봐줄 수 있는 규모가 아니겠냐는 설득이 쪼끔 통했다.


일단 들어온 녀석들은 봐주기로 하니 좀 궁금했다. 집안으로 들어온 무당벌레는 겨우내 뭘 먹고살며 뭘 하고 지내나.

겨울에 추운 밖에서라면 일단 에너지 소비를 최소화하기 위해 휴면이든 동면이든 나무 구멍 같은 아지트에 옹기종기 모여서 지낼 것이다. 체온 손실을 줄이기 위해 아지트에서 무리를 지어 붙어 있을 것인데 따뜻한 집안에 들어온 녀석들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뿔뿔이 흩어져 여기저기 해찰하듯 눈 닿는 천정과 벽의 모서리마다 무리 지어 기어 다니고 창문 커튼에도 여기저기 달라붙어 있다.

이 녀석들은 사람을 웃길지도 안다. 지들만큼 할 일 없고 심심한 겨울 백수가 살짝 건들면 그대로 툭 바닥으로 떨어져 죽은 척 시커먼 배가 하늘을 보게 누워 꼼짝 안 한다. 숨죽이고 가만히 보고 있으면 눈치 보며 작은 날개를 슬쩍 내밀어 능숙하게 몸을 뒤집고 느긋하게 다시 움직인다.

겨울이 왔는지 모르는 놈들이 축적한 에너지를 헤프게 쓰는 것이다. 밟지 않으려 조심하지만 으깨지는 놈들도 있고 뒤집어져 있는 놈들도 있다. 봄이 오면 이층 여기저기 바짝 말라 있는 무당벌레 사체를 보게 된다. 실내 체류 허락을 받은 놈들은 무당벌레 말고는 없다. 천적은 없다는 뜻이다.

아무래도 꼼짝 않고 웅크리고 있어야 할 겨울 동면 시기에 쓸데없이 기운을 낭비해서 허기져 죽은 것으로 정리한다.

사람에 맞춘 환경에서 편하게 지내려다 먼저 가는 녀석들이 많다는 걸 알았다. 알고 보니 다 내 탓이다.


겨울을 몇 번 지내고 어설프게 베푼 자비심이 무당벌레에게 독이 된다는 것을 깨달으니 늦가을에 무당벌레를 밖으로 내보내도 자연이 죽이지는 않는다는 믿음이 생겼다. 이제는 눈에 띄는 대로 침입한 녀석들을 빗자루로 쓸어 담아 창문 밖 정원으로 이동시킨다. 적자생존- 영지에 낙엽도 많이 모아서 여러 무더기로 쌓아놨고 잘라놓은 나뭇가지 묶음도 여러 곳에 있으니 밖에서 지낼만한 따뜻한 곳 찾아보렴 하면서.

무당벌레- 느리고 게으르고 곱상해서 약해 보이지만 알고 보면 자연에서 무척 강한 놈이다. 왜?

진딧물, 깍지벌레 같은 맛없는 것만 먹고 살쪄서인지 화려하게 반짝이는 무당벌레 잡아서 먹어봐야 바로 뱉어내야 할 만큼 맛없는 것으로 이미 하늘을 나는 놈들과 땅을 기는 놈들에게 소문이 다 났기 때문이다. 잡아 먹히는 순간에 분비하는 체액이 끔찍한 맛을 선사해 준다.

먹이로서 그 맛으로 쇼킹하게 강한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일단 교미를 시작하면 하루 종일 한다니 그 강하고 느긋함을 진정 부러워해도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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