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중희 May 19. 2022

김여사의 상큼 발랄한 화요일 오후

모든 게 후덥지근한 날씨 탓이다


온도가 쭉쭉 올라가던 5월 어느 화요일 오후였다.

이젠 진짜 여름 안에 들어왔나 보다.

작년에 쓰고 넣어둔 선풍기를 꺼내야 할 때 가 왔나? 싶게 무더웠다.

원래 독일의 여름이라 하면 자외선이 강하고 습도가 낮아 건조하게 덥다.

한마디로 햇빛에 나가면 따갑게 덥고 그늘에 들어 서면 살만한 그런 날씨 다.

그래서 예전엔 여름에 선풍기도 없이 사는 집들이 많았다. 독일 사람들이 워낙 검소한 이유도 있지만 굳이 필요하지 않아서 다.

해를 거듭할수록 지구온난화로 여름이 빨리 찾아오고 더운 날이 많아지고 있다

더위도 세대차이가 난다고나 할까?

요즘은 여름 되면 찾는 사람이 많아져 전자상가에서 선풍기를 제일 중앙에 놓고 판다.

물론 아직도 아이들 학교나 버스, 전차 대중교통 또는 공기관에 에어컨은커녕 선풍기도 없는 곳이 많지만 말이다.


그런데...

독일에서도 유달리 더운 날씨가 있다 마치 우리의 장마철 어느 날 같이 후덥지근하고 끈끈한...

그런 날씨를 Schwülwarmes wetter라고 한다.(*여기에 얽힌 다른 재미난 사연은 다음번에...)

안 그래도 갱년기라 자체적으로 수시로 일교차가 큰데 후덥지근 까지 겹치니 환장하겠는 거다.

그런 날씨의 화요일 오후였다.


나는 4년째 독일의 개인 병원에서 매니저로 일하고 있다. 이제 우리 병원은 올여름 졸업을 앞둔 MFA (의료 전문 보조인 ) 인턴까지 합쳐 직원이 다섯 명이다.

덕분에 다달이 근무 계획서를 작성하면서 최소한 화요일 목요일 오후 근무 라도 빼려고 노력한다.

그래야 워킹맘 이자 주부인 내게도 살림 살 시간 또는 개인 시간이 확보되지 않겠는가?

그나마 직원들 중에 병가 또는 휴가 가 없는 주에나 가능한 일이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그 화요일은 오전 근무를 끝으로 퇴근을 할 수 있었다.

단지 가방 안에 내손을 거쳐 회계사 사무실로 넘겨야 할 병원 서류들이 잔뜩 들어 있고 그것들과 함께 퇴근했다는 것 빼고는 말이다.


다른 날 보다야 조금쯤 여유 있는 오후 시간을 갖게 되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바빴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똑같이 정해져 있고 그 시간 내에 조금 더 많은 일을 하려면 시간을 쪼개어 쓰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식구들 점심을 차려 먹이고 막내는 숙제시키고 남편은 병원으로 오후 진료를 보내고 우리 집 멍뭉이 나리와 산책을 하고 나니 시곗바늘이 오후 3시가 너머 가고 있었다.

덥고 지치지만 얼른 시장 한번 다녀와야 아직 볕 좋을 때 빨래 돌려놓은 거 베란다에 널고 서류 잠깐 들여다보다가 저녁 준비해서 퇴근한 남편에게 늦지 않은 저녁을 차려 줄 수 있을 테다.



장바구니 가방에 넣고 집 근처 마트들 중에 고기와 과일이 신선한 Tegut으로 걸음도 씩씩하게 향했다.

왜 그런 날 있지 않은가? 왠지 다른 날 과는 조금 다르고 싶은 날..

시장을 가더라도 평소 옷들은 벗어던지고 차려 입고 다른 사람이라도 된 양 변신? 하고 싶은 날 그날은 바로 그런 날이었다.

 

거기다 집 근처에 대학 건물들이 많아 오가는 우리 딸내미 만한 젊은 아이들이 상큼 발랄하게도 맨소매 내지는 끈달이 원피스를 시원 스레 입고 다니고 있었다.

그날따라... 왠지 그들처럼 얇은 어깨끈 달린 원피스를 입고 싶은 거다.

옷장 안에 얌전히 걸려 있던 끈달이 원피스를 하나 꺼내 입고 보니 얇디얇은 어깨끈이 못내 안쓰러울 만큼 겨우내 소리 없이 키워온 나의 팔뚝은 몹시도 건장했다.

그 팔뚝을 그대로 내놓고 다닌다고 누가 경찰에 신고하지는 않겠지만 스스로 양심? 에 찔려 용감하게 그 위에 청자켓을 걸쳐 입었다.



집 근처 다른 마트들은 평지를 걸어 일직선으로 아래쪽 왼쪽으로 가거나 오른쪽 위쪽으로 가야 하는 것에 비해 Tegut 마트는 거리상으로는 가깝다. 해서 빠른 걸음으로 가면 집에서 약 15분 즘 걸어가면 되지만 중간에 언덕길들이 있어 체력 소모는 동네 뒷산에 가서 약수 떠오는 거 보다는 더 된다.

해서 늘 평소 청바지에 운동화 차림이었다


마트 가는 길….

오지게 더운 거다.마치 전장에 나가는 장수가 덧입은 갑옷 같은 청자켓은 언덕길을 오르는데 내가 왜 이노무 원피스를 꺼내 입었나 소리가 절로 나오게 했다.

하나도 안 더운 척 헉헉 거리며 두 번만 상큼했다가는 발랄이 아니라 발광하겠네 할 때쯤 언덕배기를 열라리 올라가 마트에 도착했다.


냉장칸이 많은 마트 안은 시원했다. 그래 이거지 만족스러운 얼굴로 과일 칸에서 복숭아와 베리 들을 골라 담고…

채소 칸을 지나 치며 음흉한 웃음을 흘렸다.

보니까 유기농 허브들과 상추들 그리고 토마토 모종들을 기획 상품처럼 예쁘게 데코 해서 모셔 놓고 있었다.


아 놔~요즘 우리 집 텃밭에 널린 게 유기농 상추와 허브들 아닌가 음하하하

그리고 요즘 무럭무럭 잘 크고 있는 토마토와 오이 모종들에서는 조만간 어여쁜 토마토와 오이가 달릴 것이다

괜한 텃밭 부심으로 우리 집 텃밭은 그냥 유기농 자체 구만… 해가며 거만하게 채소 칸을 지나 고기 칸으로 갔다.

한참 자라는 나이라 고기를 많이 찾는 우리 막내를 기쁘게 해 줄 스테이크용 고기와 며칠 있으면 집에 올 큰아들과 딸내미 먹일 고기들을 미리 주문해 두기 위해서다.


주로 시원한 냉장칸 위주로 돌아다니던 마트 안에서 흡족하게 장을 보고 계산대에서 줄을 섰다.

아직은 오후 늦은 시간이 아니라 사람들이 많지 않아 금세 줄이 줄어들었다.

내 앞에 서너 사람쯤 남아 있을 때였다. 계산대 위에 계산할 물건 들을 하나하나 얹어 놓으며 원피스에 맞춰 등짝에 매고 온 쪼그만 가방에서 장바구니를 꺼내 들었다

그런데 어쩐지 느낌이 무진장 쐐... 했다.

아뿔싸.. 가방 안에 지갑이 없다. 가방 어디에도 동전 한알 없다. 

이런 난감할 때가....

그날따라 변신을 꿈꾸던 내가 원피스 꺼내 입은 김에 평소 들고 출퇴근하는 커다란 가방을 두고 손바닥 만한 배낭을 메고 나왔다.

가방에 장바구니를 쑤셔 넣고 그 코딱지만 한 가방이 옷과 어울리나 거울에 비쳐 보고는 그대로 집을 나섰다.

된쟝 이제야 그 모든 게 선명하게 기억이 나다니...

거실 소파 위에 우아하게 놓여 있을 커다란 가방 안에 지갑이 그냥 나가는 내게 '아줌니 미친 거 아녀?' 했을지도 모른다.

살다 살다 지갑 없이 마트를 오다니 말이다.


다른 생각할 틈이 없었다. 빛의 속도로 계산대에 올려 두었던 물건들을 다시 마트 바구니에 모조리 쓸어 담았다.

계산대에서 마트 직원이 물건의 바코드를 스캔하는 순간 계산을 하던가 아니면 찍었던 것 몽땅 취소하고 담아 왔던 물건 들을 제자리 정리해두던가 둘 중 하나 해야 한다.

그사이 뒤에 있던 사람들은 괜한 시간 기다려야 하는 거다 그런 민폐를 끼칠 수는 없다.

게다가 고기는 잘라 온 것이라 다시 반납할 수도 없다 

선택의 여지없이 집까지 뛰어갔다 와야 한다. 

몇 분의 당혹, 난감, 어이없음, 이 차례로 지나가고 내 앞에 한 사람이 카드를 꺼내 들고 계산을 하고 있을 때쯤 계산대의 직원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정중히 부탁했다.

"제가 지갑을 집에 두고 왔어요 이 바구니 그대로 옆에 잠깐 놔둬 주시면 잽싸게 집에 갔다 와서 계산할게요! 집이 요 근처예요!"

다행히 맘 좋은 직원은 "뭐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죠 그렇게 하세요!"웃으며 흔쾌히 부탁을 들어주었다. 

나는 '지금 뭐 하는 거임?' 하는 눈으로 쳐다보는 다른 사람들을 지나쳐 커다란 마트 바구니를 직원에게 택배 건네듯 주고 그 길로 겁나 뛰었다.

그 더운 날 마트 가는 언덕길을 체력단련하는 육상 선수같은 기세로 2번이나 왕복했다.

끈달이 원피스 입고 상큼 발랄하려다 식겁 환장할 뻔한 화요일의 오후였다. 

매거진의 이전글 독일 주택가 안에 만연한 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