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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중희 Jan 08. 2023

남편의 비상금과 밀도 짱짱 파이팅 김밥


드라마나 영화를 보다 보면 부부나 가족이 등장하고 일상의 수많은 장면 중에서 극 중 남편이 아내 몰래 비상금을 감춘다거나 아내가 남편의 비상금을 추적하는 장면이 나올 때가 있다.

어딘가 비상금이 묻혀 있는 비밀의 장소는 때로 장롱 속에 갇혀 있던 입지 않은 옷이 될 때도 있고 가족사진을 걸어둔 액자 뒤편 일 때도 있으며 극 중 남편의 양말 속 또는 신발 깔창 밑 일 경우도 있었다.


눈썰미 좋은 아내는 남편이 애써 숨겨둔 비상금을 가뿐히 찾아 내고는 네가 그렇지 뭐 하는 표정으로 의기양양하던가 너무 엉뚱한 곳에서 발견된 비상금을 보며 이거 뭐야? 하는 표정이 되어 황당해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

그런 장면들을 보며 배꼽 잡고 웃을 때가 많았지만 사실 그 장면의 아내가 어떤 심정일지 정확하게 알지는 못했다.

그런데 며칠 전 나도 남편의 비상금을 마주 하면 아하 요런 기분이구나 하고 드디어 알게 되었다.


자동차를 거액 들여 수리하기로 결정하고 사실 막막했다.( 그이야기는 요기 클릭 새해 초 부터 대박의 징조다)

수리비를 할부도 아닌 일시불로 내야 수리된 자동차를 찾을수 있다고 했다.

살다 보면 계획에 없던 또는 생각 지도 않은 일에 돈 들어갈 일이 생기고는 한다.

엎친데 덮친 격이란 게 딱 이런 때 일거다.

불과 며칠 전인 작년 11월 12월 에는 직원들 크리스마스 보너스에 세금 그리고 우리 집 고장 난 난방기 수리비 크리스마스 선물까지 다양한 용도로 지출이 많았다.


특히나 때마다 따박따박 걷어 가는 독일의 세금은 어찌나 독하고 센지 드라마나 영화 속에 나오는 사채업자 쩜쩌 먹는다.

어느 때는 우리가 세금 내려고 일을 하나 싶을 때도 있다 (눈물 나는 독일 세금 이야기는 다음번에..)

그러니 한마디로 수리비가 나올 구석이 없는 거다.

물론 은행돈도 내 돈이려니 하고 대출을 받을 수도 있다.

안 그래도 깔고 앉은 집에 출퇴근하는 병원에 들이부은 대출금을 사극에 나오는 산적처럼 등에 쌍칼 차듯 매고 살지만 말이다.


은행 이자도 올라 만만찮은데… 머릿속에 여러 생각이 오갔다.

카센터에서 집으로 가는 길에 남편이 내 얼굴을 흘끔 눈치 보듯 보더니 갑자기 시내에 들렀다 가자고 했다.

아마도 마누라 기분 업 시켜 주려 모카 커피 하잔 사주러 가려나 보다 했다


남편과 시내에서 들르게 된 곳은 생뚱맞게도 S 은행이었다.

눈치 빠른 울 독자님 들은 요기서 아하하고 눈치채셨을 것이다 그렇다 남편의 비상금은 양말속도 액자 뒤도 아닌 은행 안에 있었다.

S은행은 우리가 거래하는 은행이 아니다 여기서는 우리 집에 자연재해 라든가 무슨 일이 생겼을 때를 대비해 들어 놓은 건물 보험만 하나 있을 뿐이다.

그런데 남편은 요기다 매달 조금씩 비상금을 넣어 두고 있었다.


처음엔 아 자동차 수리비 해결 됐다 싶어 안심되고 좋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왠지 서운 했다.

내가 모르는 은행 계좌가 있다니 말이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남편의 비상금을 발견한 아내들이 황당해하면서도 서운해하는 마음을 십분 이해할만했다.

남편은 그 흔한 주식도 로또도 하지 않는다. 매일 같은 직장에서 일하고 병원의 재정이나 우리 가정의 씀씀이도 빤하다 그중에 내가 모르는 게 존재 할리 만무하다. 생각해 왔다.


그런데 딴 주머니? 라니 깜짝 선물 같은 비상금의 존재가 감사하다 가도 살짝 서운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올라가는 눈고리를 애써 붙들며 "왜 나한테 말 안 했어?"라고 물었다.

남편의 답은 심플했다 "네가 쓰자고 할까 봐!"

헐~그 말에 나는 평소 가끔? 읊조리는 명품 빤스 레퍼토리가 자동 발사 되었다.

"아니 내가 내 것으로 명품 빤스 한 장 산적 없고 쓰자고 해봐야 애들것 아니면 먹는데 밖에 더 있어?

그것도 내입으로 다 들어 가나 엉?"

남편은 나의 입에서 랩같이 쏟아지는 소리들을 너튜브 보다 광고 거르듯 스킵하고 씩씩하게 앞서 걸었다.


집에 와서도 마누라의 나온 입이 들어갈 기미가 보이지 않자 남편은 필살기를 주워 들었다.

냉장고에 소시지와 계란, 단무지도 꺼내고 채소칸에서 오이, 당근도 내오고 냉동고에 아이들 오기 전 아시아 식품점에서 사다 놓은 게맛살과 어묵도 꺼내 녹였다

그러고 나서 남편은 주방 서랍에서 김밥 용 김을 확인하고는 밥솥에 하얀 밥을 고슬고슬하게 지었다.

지난번 오랜만에 김밥을 말아 칭찬을 들었던 남편은 매일 수백 개의 김밥을 눈 깜짝할 사이에 마는 김밥의 달인 같은 포스로 주방을 휘저었다.

어찌하려나 알아서 하겠지 하고 흘끔 거리며 아이들이 좋아하는 두 가지 버전의 새우튀김을 하다가도 콧속으로 스며 오는 참기름 냄새에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남편의 김밥은 참기름이 더 많이 들어가고 재료와 밥이 밀도 있게 꽉 들어찬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아끼느라 반으로 잘라 준비하는 게맛살도 통째로 계란 지단도 어묵도 굵직하게 당근도 오이도 단무지도 넓적하게 칼질 몇 번 하지 않고 재료준비를 끝낸다

그런데 그 재료들이 넉넉한 밥과 맞물려 그야말로 빈틈없이 속이 꽉 찬 김밥으로 탄생한다.

그래서 내가 붙인 이름 밀도 짱짱 김밥 되시겠다.

우쨌거나 서운한 건 서운한 거고 김밥은 김밥이다.


마치 분식점에서 파는 김밥처럼 겉에 참기름이 반지르르 깨가 톡톡 붙어 있는 남편의 짱짱한 김밥을 썰어 담고 내가 끓인 된장국과 새우튀김을 담으며 아이들을 불렀다.

온 가족이 둘러앉은 식탁은 언제나 즐겁다

맛난 김밥을 오물오물 거리며 막내가 물었다 "나는 몇 살부터 김밥을 먹었어?"

"음 너는 이가 일찍 나서 한 살 되기 전부터 여러 가지 먹을 수 있었어!"

그러자 딸내미가 물었다 "나는 언제 이가 났어?" 그 후에 이어지는 큰아들의 질문 "나는 언제부터 말할 수 있었어?"

계속 이어지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아이들 어릴 적에 관한 질문들에 나는 내가 기억하는 아이들 아기 때 이야기들을 디테일과 리얼리티에 조금의 연기를 얹어 연극을 하듯 실감 나게 이야기해 준다.

막내가 이야기했다."엄마에게 듣는 아기 때 이야기는 진짜 재밌어! 몇 번은 들은 것 같은데 들을 때마다 새로워"


나는 막내의 극찬에 잘 나가는 뮤지컬 배우 라도 되는 양 어깨를 으쓱이며 턱이 빠져라 입을 크게 벌려 입안 가득 김밥을 밀어 넣는다.

'음 이맛이지!' 아는 맛이 무섭다고 익숙한 맛이지만 내가 만든 김밥 보다 간이 더 간간하고 속이 꽉 차서 씹는 맛이 더 좋은 남편의 김밥은 갑자기 뚝떨어진 비싼 자동차 견적서로 속상했던 마음도 나 몰래 감춰 두었던 비상금에 섭섭했던 마음도 위로가 되고 날릴 만큼 맛났다.

인생 뭐 있나 이렇게 온 가족이 모여 맛난 거 먹으며 즐거워할 수 있으면 그걸로 된 거다.


비록 남편이 한국 놀러 갈 때 쓴다고 모아 두었다던 비상금을 몽땅 털어 차에 넣게 생겼고 어쩌면 이번 온 가족이 여름에 한국 가려던 계획이 불발될지도 모르지만 가족 모두 건강하게 이렇게 함께 있으면 모든 게 다 괜찮은 거다.

김밥 속 재료들은 남으면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 다음날 볶음밥 만들어 먹지만 참기름 소금 양념해 놓은 밥은 그날 다 소진해야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남편은 점점 밥을 많이 넣고 김밥을 말아먹을수록 입을 크게 벌려야 하는 김밥이 나온다.

푸짐한 크기의 고소한 김밥을 파이팅 넘치게 입안 가득 밀어 넣으며 즐거운 상상을 해본다.

'혹시 숨겨 놓은 비상금 또 있는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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