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중희 Jan 28. 2023

어리숙한 독일의 보이스피싱

사기꾼은 부지런해


정신 없던 오전 진료 시간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있었다.

이쯤 해서 카페인의 공급이 절실하다 싶어 라테 한 모금 머금고 있을 때였다.

우리 병원 신입 GL이 급하게 전화기를 들고 내게 달려왔다.

나는 웃으며 무슨 일인지를 물었다.

저 혼자 해결이 안 되는 일 일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독일 병원에서 일을 하다 보면 워낙 서류 처리 해야 할 일들이 많고 환자 또는 보호자들과 상대하고 전화 통화 해야 할 일들이 많아 여기가 어디? 나는 누구? 할 때가 있다.

여기가 병원인가? 콜센터 인가? 아니면 주민 센터 인가? 고객센터인가? 헛갈릴 때가 정말 많다.


때로는 안 되는 것을 되게 해달라고 빡빡 우겨쌌는 사람, 의료보험 회사에 가서 해야 할 이야기를 마구 풀어놓는 사람, 바빠 죽겠는데 온 가족 처방 전을 전화로 신청하며 약이름 찾으러 방에 가본다며 기다려 보라고 하는 사람, 자기가 이해할 때까지 설명 을 해 달라고 전화통 붙들고 미주알고주알 늘어놓고 있는 사람,

병원 들어온 지 10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나를 잊어 버린거냐며 환자 대기실을 박차고 나오는 사람, 진짜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다.

이건 정말이지 그동안 내가 알아온 독일 사람들이 아닌데 싶을 때마다 드는 생각은 내가 그동안 너무 보편 적인 것만 알았구나 하는 거다.

독일 사람들의 가장 장점 중에 하나인 인내심이 병원 문턱을 넘게 되면 오데로 갔나? 오데가? 하며 증발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병원밥 5년 만에 받아들이기로 했다.

마트의 계산대 긴 줄이 요동치 아니하고 줄지 않아도 비 오는 날 우체국 앞에 늘어선 줄이 하염없이 길어져도 불평불만 늘어놓지 않고 조용히 기다리던 사람들 다 어디 갔나?


독일에서 짧지 않은 세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살아왔건만 그동안은 겉 핥기 식의 표면적인 것만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싶게 병원에서 일을 하다보면 다양한 일들과

마주한다.

결국 사람 사는 데는 어디나 다를 바 없구나 싶다.독일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이렇다 라고 생각 했던 것들도 나의 섣부른 선입견에 불과할지도 모르고 말이다.


그 다양한 사람들 중에 개념이 이웃동네 마실 간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가 애당초 입력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을 상대하려면 경험과 연륜에서 나오는 상황별 사람별 타이밍 좋게 치고 빠지는 기술? 이 필요하다

그러니 이제 병원에서 정식 직원이 된 지 6개월 차인 우리 신입이에게는 여러 모로 버거울 때가 많지 않겠는가?

그럴 때 나는 기꺼이 해결사가 되어준다

언젠가는 이런 일도 있었다

우리 신입이 얼굴이 벌게져서 들고 온 전화 수화기 안에서는 나 말리지 마 지금 겁나 화났어하는 것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분기탱천 하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렇게 전화통에 대고 박박 성질을 내며 자기가 76번째 전화를 돌려서 겨우 통화가 되었다며 씩씩 거리고는 사람에게…..


나는 속으로 그 시간에 엎어지면 코 닿을 때 있는 병원으로 뛰어 오고 말겠다 싶었으나 상냥을 쳐발 쳐발 한 목소리를 장착한 체 나긋나긋 이야기했다.

"월요일 오전 진료 시간이잖아요 이 시간에는 병원에 오시는 분들도 전화도 난리가 아닐 시간이에요 잘 아시잖아요? 이해해 주세요, 지금처럼 이렇게 통화가 길어지면 다른 분들은 76통 전화 돌려도 통화 못하는 거 아니겠어요. 처방전, 이랑 서류가 이거, 저거, 요거 필요하시다는 거죠 오늘 12까지 찾아가시던가 내일 찾아가세요. 후딱 해놓을 게요"

하고 끊었다. 우선, 반박할 수 없는 팩트 폭격을 차근차근하게 날려 놓아 움찔하게 해 놓고 성질내다 자기가 왜 전화를 해 댔는지 까먹고 버벅 대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으로 화제의 대상을 날름 옮겨 버린다.


그러면 "아니 무슨 병원에 이렇게 전화가 힘드냐"라고 언성을 높여 대던 사람이 아.. 아.. 네... 네... 고마워요 하다 끊게 된다.


상대가 지승질 풀릴 때까지 해대는 것을 다 받아 주며 휘둘리다 개빡쳐서 같이 화를 내버리면 결국엔 내 기분도 똥 되고 구글에 별테러받는 것을 자행하는 꼴이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적당한 때에 치고 빠지기 기술은 타이밍도 난이도 조절도 매우 중요하다.

물론 이놈의 기술이 하루아침에 느는 것이 아니라는 게 문제다.


5년 차에 접어든 나는 그동안 수백 번 수천번의 어처구니없는 상황과 마주 했으며 종류별 특이한 사람들과 화나는 일들을 두루 섭렵했다.

수도 없는 나날들을 당황하고, 열받고, 스트레스받고, 눈물 나고 우울했으며 퇴근해서도 했던 생각 또 하며 이불킥 하느라 불면증에 시달려야 했다. 그 대신에 이마빡에 늘어난 주름과 출렁이는 뱃살을 덤으로 받으며 말이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상황별 사람별 케이스들이 차고 차곡 쌓이다 보니 내 안에 구분하고 상대할 수 있는 내공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때부터는 나름의 노하우들이 소리 없이 정립되고 있었다.


이제는 웬만한 일에는 눈하나 깜짝하지 않는 뻔치와 내 건강을 위해 퇴근과 동시에 있었던 일은 가방 안에 넣고 잠가두는 습관이 생겼다.

그래야 내일 또 다른 상황과 맞닥뜨릴 힘과 용기를 충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곰탕도 아닌데 욹어 먹어 봐야 나만 손해 다빡치는 상황과 엿같은 사람들은 널리고 널렸다


나는 단전호흡을 한번 하고는 전화기를 넘겨 봤았다.

어떤 상황에서도 먼저 흥분하지 않으리라 하는 나의 워밍업 정도 되겠다.

전화 안에서는 상상과는 다른 나긋나긋한 젊은 남정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하던 순간 감이 오기 시작했다

그 젊고 친절한 남정네는 000 병원 맞으시죠? 라며 자기는 000 회사의 직원이며 지난번에 자기네 회사에서 인쇄기 용품들을 사지 않았느냐 물었다

거기서부터 이상한데? 했다. 우리는 그런 회사에서 인쇄기 용품들을 샀던 일이 없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 남자는 나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은 채 예의 그 빤한 멘트를 날렸다 "고객님 축하드립니다 인쇄기 잉크 40유로짜리 상품권을 받게 되셨어요 그래서 잉크를 보내드리려고 하는데 쓰고 계시는 인쇄기 이름이 뭔가요?"

나는 순간 예전에 즐겨 보던 개콘 코너가 떠올랐다.

고객님 당황하셨어요? 하던 그 코너 말이다.

"000 고객님 이 시죠? 축하합니다 고객님 여행 상품 권을 타게 되셨어요 그래서 전화드렸는데 고객님의 계좌 번호와 비밀 번호를 알려 주시면 비행기 외에 모든 것이 들어간 상품권을 보내 드립니다. 류의 것을 했던 배꼽 잡고 웃었던 그 코너 말이다.


그렇다 멀쩡한 목소리의 보이스피싱이다. 생각을 해보자 구글에 검색하면 병원 주소 전화번호 따위는 수도 없이 저장해 놓을 수 있다

그리고 컴퓨터와 인쇄기는 모든 병원에서 사용한다.

그러나 첫째 우리는 그 회사에서 인쇄기 용품들을 산적이 없을뿐더러 우리 사용하는 인쇄기의 잉크는 40유로를 주고 살 수도 없다.

결정적으로 우리가 만약 그 회사에서 인쇄기 잉크들을 샀다면 배송 리스트가 남아 있을 텐데 기종의 이름을 알려 달라니 이거 너무 빤하고 어리바리해서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이걸 어떻게 박살 내지 싶다가 문득 내가 이렇게 나오면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가 무지 궁금해졌다.

나는 생기발랄 기쁜 척 목소리 톤을 올려 가며"어머나 감사해라 잘됬네요 그런데 잘 아시겠지만 지난번에 많이 사둬서 아직은 필요 없는데 그 상품권 우리가 필요할 때 나중에 써도 되나요?

그러자 그 남자는 아 이제 넘어 왁스 싶었던지 기쁨의 쾌재를 지르듯 밝은 목소리로 "그럼요 되고 말고요 그런데 인쇄기 기종이 뭐였죠?라고 다시 물었다.

나는 그 질문을 가볍게 패스하며 "나중에 우리가 필요할 때 전화 해서 쓰고 싶은데 전화번호를 알려 주실 수 있죠?라고 했다.

그랬더니 훅 하고 당황한듯한 숨소리가 들리며 마지못해 아무 번호나 막 불러대는 것 같은 길고 긴 전화번호를 주었다.

나는 생글 거리며 "그래요 고마워요 나중에 필요한때 우리가 딱 요번호로 전화를 할게요 그런데 지금 전화하신 분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라고 물었다


이번엔 정말 당황한 것이 역력한 떨리는 목소리로 말까지 더듬어 대며 말했다

"로... 로...로랜스입니다"

전화를 끊고 불현듯 개콘의 황해라는 코너가 떠올랐다.

이리저리 잘 피해 가는 고객님 에게 어리바리한 보이스피싱 신입이가 "고객님 제가 보여요?"라고 했던 것이 생각나 한참을 웃었다.


얼마나 당황스러웠겠는가...

40유로 공짜 상품권으로 인쇄기 잉크를 준다고 낚시질해서 어떤 기종의 인쇄기를 쓰는지 알아 내고비싼 잉크 영수증 끼워 잔뜩 보내고 받고 나면 무를 수 없다 하려고 했는데...

지금 당장 필요 없으니 나중에 받는다 하지 인쇄기 기종은 이야기도 안 해주지..

병원 주소와 전화번호는 인터넷 검색 만으로 얼마든지 알아낼 수 있겠으나 우리가 뭘 쓰는지 알아야 맞춰 보내고 덤터기를 씌우지 않겠는가

거기다 전화번호에 이름까지 물어보니 월매나 식겁했겠는가.

자초지종을 전해 들은 직원들은 모두 같이 한바탕 웃었다 그리고는 우리의 신입이가 말했다.

그 사람 이번주만 벌써 세 번째 전화했는데 그때마다 다급하게 담당 매니저를 바꿔 달라 했다고 말이다.

나는 웃으며 이야기했다 "사기꾼은 원래 부지런한 법이야!"




매거진의 이전글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 권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