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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중희 Feb 06. 2023

정월 대보름과 아버지와의 추억


깨톡~! 하고 친정 엄마에게서 톡이 들어왔다

핸드폰의 작은 화면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보기에도 푸짐해 보이는 갖가지 나물들…

밤, 잣, 은행, 땅콩, 대추, 호두…

사진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오곡밥에 나물 먹고 부럼 깨는 날.

독일은 음력도 정월 대보름도 없지만 오늘밤 분명히 쟁반만 한 보름달이 뜰 게다.

이 동네는 땅덩이가 크고 넓어 그런가 사람도 크고 채소도 크며 달마저도 크다.

둥글고 큼지막한 달이 뜨면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 ~’ 하고 달 타령이라도 불러 볼까?

보름달 생각 하며 엄마에게 온 사진과 톡을 보고 있자니 어느새 어린 시절 정월 대보름 날의 추억 한 자락이 툭 하고 펼쳐졌다.


나는 아주 어린 시절 에는 대들보가 있고 사랑채와 별채가 있던 한옥집에서 살았다.

그것도 조 할머니부터 조카까지 자그마치 5대가 함께 살았고 그러다 어느 날 분가를 해서 지금의 우리처럼 다섯 식구가 되었다.


그때 우리가 살던 집은 파란 대문을 열고 들어 가면 장미나무가 있고 작은 마당이 있었다.

그 맞은편에 신발을 벗어 두던 두 개의 계단이 있었고 그 위에 옆으로 밀어 여는 미닫이 문이 있었다.

열 때마다 드르륵 하는 소리가 나던 문을 열면 마루가 나왔다.


툇마루라 부르고 지금의 거실 같던 쓰임새의 마루에서 여름이면 식구들이 둘러앉아 식사를 하고 과일을 먹고는 했었다.

그런데 마당 한가운데 있던 수도가 얼지 않게 천으로 돌돌 말아 두고 그 뒤쪽의 장독대에 덮개를 덮어 두는 겨울이 오면 외풍도 세고 너무 추워서 마루가 아닌 안방에 상을 펴고 식구들이 옹기종기 모이고는 했다.

그렇게 추운 겨울 선명하게 떠오르는 날이정월 대보름 이다

정월 대보름 날이면 달맞이도 해야 하고 부럼도 깨야 하고 잣불 놀이도 해야 해서 늦게 까지 자지 않아도 되는 어린 우리에겐 매우 특별한 날이었기 때문이다.


그 시절 우리에게 두툼한 겨울 내복은 집에서 입는 홈드레스이자 잘 때까지 입는 잠옷이었다.

내복 차림의 아이들이 상을 가운데 두고 모여 앉으면 어김없이 엄마의 정월 대보름 찰밥과 나물들이 상위에 올라왔다.

콩과 팥 수수 등의 곡식이 잔뜩 들은 밥과 나물들은 어린 우리에게는 그리 힙하지 않은 음식이었다.

지금은 없어서 못 먹는 이 귀하고 맛난 음식이 어릴 땐 왜 그리 별로던지....


곡식이 잔뜩 들은 밥은 입안 가득 모래알처럼 까끌거렸고 이런저런 나물들 특히나 쓴맛이 강한 도라지나물은 뭔 맛으로 먹는지 왜 어른 들은 맛 나다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냥 하얀 쌀밥에 소시지 반찬이면 황홀할 텐데 했다.

그래서 동생들과 나는 서로 누가 더 나물과 찰밥을 덜 먹나를 눈치 게임 하듯 했다.

먹는 둥 마는 둥 저녁을 먹고 나면 진짜 대보름의 빅 이벤트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 시대에도 제법 늦은 나이에 아이들을 줄줄이 셋이나 보았으나 평소 살가운 성격은 아니셨다.

말수도 별로 없고 무뚝뚝한 성정 이셔서 표현을 잘하지 않으셨다. 이제 그때의 아버지 보다 더 나이가 들다 보니 알 수 있을 것 같다.

아버지는 당신의 마음을 여러 모양으로 보이고 계셨지만 그때의 아이들이 알아볼 수 있게 표현을 못하셨을 뿐이라고 말이다.

그런 아버지가 아이들과 놀아 준다거나 하는 건 크게 기대할 일이 못되었다.

그 아버지가 유일하게 아이들과 놀이 비슷한 것을 하셨던 것이 정월 대보름이었다.



우리는 밤, 땅콩, 호두 같은 것을 입에 물어서 딱 하는 소리가 나게 잇자국을 내고는 그걸 마루 문을 열고 마당 화단에 던졌다.

한 해 동안 병나지 않고 건강하게 해 준다는 부럼 깨기 였다. 어려서 왜 그것들을 깨물어서 던져 버리면 건강하게 되는지 이해 가 되지 않았으나 화단에 던져두면 밤이 열리거나 땅콩 또는 호두가 자라날 수도 있다는 말에 혹해서 열심히 했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말랑한 땅콩은 쉬웠지만 딱딱한 밤이나 호두는 쉽지 않았다.

우리는 엄마가 살짝 칼금을 넣어 도와준 잇자국 성성한 것들을 얼른 마루문 열고 멀리 화단에 던졌다.


찬바람 들어올세라 빠르게 마루 문 닫고 안방에 조로미 모여 앉은 우리는 정월 대보름의 클라이맥스인 잣불놀이를 기다렸다.

요즘도 정월 대보름에 잣불 놀이를 하는 사람들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놀이도 볼거리도 별로 없던 시절이라 그 잣불 놀이가 그리도 재미있었다.

특히나 어릴 때는 불장난을 좋아하지 않는가? 게다가 불꽃이 클수록 마치 게임에서 이기기 라도 한 것처럼 으쓱해 지고는 했다.

그 시절 집집마다 가지고 있던 이불 꿰매던 긴 바늘 위에 굵은 잣을 골라 꽂는다.

그리고 그 위에 불을 붙이면 요즘 작은 불꽃놀이 못지않게 불이 활활 타오르고는 했다.


그게 뭐라고 얼마나 떨리던지 불꽃이 클수록 그해 운수가 좋다는 것은 어른들의 말이고 우리는 그저 작은 불꽃놀이 같은 그 광경이 신났을 뿐이다.

그때는 평소 조용하시던 아버지 마저 들뜬 듯 보였다.

우리는 두근두근 하는 마음으로 긴 바늘 위에 달린 잣을 들고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는 동네 중국집에서 받은 대성각 중화요리라고 쓰여 있던 팔각형 모양의 커다란 성냥각에서 긴 성냥을 꺼내어 한 사람씩 순서대로 불을 붙여 주셨다.

그런데 정말이지 신기한 것이 각자의 불꽃 모양이 다 달랐다.

가지고 있던 잣의 모양이 달라서 그랬는지 타들어 가며 만들어 내던 불꽃의 크기와 모양이 모두 각기 다른 모습이었다.

좀처럼 웃음소리가 크지 않던 아버지도 크게 웃으시며 "우와 이거 봐 이렇게나 크네!" 하며 즐거워하셨다.

둥그런 달이 뜨던 정월 대보름날 우리는 그렇게 늦은 시간 까지 잣불 놀이 하느라 밤을 잊은 듯 했다.


이제는 정월 대보름이라고 아버지와 함께 잣불 놀이를 할 수 없지만 나는 언제든 마음속 추억의 잣불을 켤 수 있다.

그 불꽃 속에는 잣불을 붙이며 즐거워하시던 아버지의 모습도 곱고도 고왔던 젊은 울 엄마의 모습도 그대로다.

정월 대보름 이어도 나물도 오곡밥도 부럼도 없는 독일에서 하루종일 비 오고 눅눅하고 추운 날씨에 나는 한국에서 아버지와 식구들과 함께 보냈던 정월 대보름의 추억을 만나며 따뜻한 오후를 보냈다.

우리 아이들에게도 그렇게 언제든 켜 볼 수 있는 추억이 하나 둘 쌓여 가기를 바란다.

그리고 당신에게도 마치 요술쟁이 지니의 요술램프처럼 생긴 추억의 램프가 있었으면 좋겠다.

탁 하고 불을 붙이면 언제든 그 안에서 당신 만의 작고 소중한 추억들과 만날 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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