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 어릴 때 했던 어린이 벼룩시장이 생각났다
독일에서 만나는 29 번째 봄이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말 설고 낯선 땅에 발을 디딘 그봄...
조금 보태서 키 만한 가방을 질질 끌고 비행기 타고 기차 타고 버스 타고 도착한 독일의 첫 도시,
말도 안 통해 손짓 발짓 해 가며 물어 물어 간신히 찾은 숙소,
그곳은 아름드리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는 푸른 숲과 마주 하고 있었다.
나무마다 한껏 초록을 품은 잎사귀들이 햇빛 받아 반짝이며 바람 따라 찰랑 거렸다.
마치 파란 바닷물을 하얗게 안고 작게 부숴 지던 파도의 물알갱이처럼...
내 마음속 가득했던 낯섦과 두려움은 눈부시던 5월의 신록 따라 그렇게 잘게 흩어져 갔다.
그때는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독일에서 살고 있을 것이라 상상도 하지 못했다.
언제 이렇게 시간이 흘렀을까? 동그마니 서 있던 기차역 플랫폼에서 내 뒤로 시간대 별로
기차만 빠르게 지나가 버린 느낌이다.
어쩌면 정신없이 지나가 버린 세월 탓에 더디게 변해 가는 독일 분위기 덕에...
미처 체감하지 못했다는 말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비록 거울 앞에 선 나는 "누구세요?" 할 지경으로 세월을 정통으로 맞았 다지만 마음 만은 그때와 다르지 않으니 말이다.
느리게 변화하는 독일에서 이젠 그때의 나보다 더 어른인 아이들과 그때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는? 남편 그리고 생각도 못했던 반려견과 그때와 똑같은 봄을 만난다.
초록의 물이 오르기 시작하는 봄..
그리고 본격적으로 신록이 우거지는 여름으로 가는 길목이면...
언제나 독일 주말에 자주 만날 수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벼룩시장이다.
동네마다 벼룩시장을 여는 장소가 다른데 어느 동네는 우리네 장터처럼 늘 벼룩시장을 여는 장소가 정해져 있기도 하고 또 어디는 때마다 달라지기도 한다.
우리 동네 같은 경우 가장 흔하게 벼룩시장을 만날 수 있는 곳이 주말에 문 닫은 대형 가구점 주차장 이라던가 마트 주차장이다
화창하던 어느 주말 오전 우리는 정원의 심을 꽃을 사기 위해 꽃 상가로 향했다
일요일 이면 상점이 모두 문을 닫는 독일에서 문을 여는 몇 안 되는 곳이다.
우리가 가는 꽃 상가는 일요일에도 오전 10시부터 12시까지 문을 연다.
다른 곳은 모두 문 닫아 있을 때 열려 있는 곳에 가는 건 왠지 특별한 느낌이 들게 한다.
몇 가지 꽃을 골라 담고(*꽃 상가와 정원 이야기는 다음번에...) 자동차 트렁크 싣다 보니 주차장에 있던 사람들이 차를 두고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들어오는 길 맞은편에서 벼룩시장을 하는 게 보였던 것이 생각났다.
마침 우리도 큰 화분들이 필요했는데 잘됐다 싶어 오랜만에 벼룩시장 탐방을 하기로 했다.
벼룩시장은 그야말로 있는 건 다 있고요 없는 건 없답니다 하는 화개장터 노랫말이 떠오른다.
얼핏 보면 어느 집을 털어 왔나 싶게 가전집기부터 그릇, 자전거, 책, 옷, 신발, 거울, 장난감, 그림, 조명, 의자 등등... 별의별 것이 다 나와 있다.
다니다 보면 어떤 이는 직업적으로 하는 분 일명 꾼 들도 있고 또 누구는 아이와 함께 더 이상 필요 하지 않은 옷이나 장난감들을 정리 하려고 가지고 나온 이들도 있다.
어떻게 구분하느냐 하면 그 물건을 대하는 표정이나 몸짓을 보면 금세 구분할 수 있다.
꾼 들은 어디선가 물건을 가져다가 판매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용 방법을 자세히 모르는 경우도 있고
또는 물건을 대하는 분위기가 다르다.
자기 아이가 쓰던 책이나 옷 또는 장난감 등을 가지고 나온 사람들은 물건이 담고 있는 추억이 있기 때문에 다를 수밖에 없다.
잔뜩 나와 있는 포켓몬 카드를 보니 우리 아이들 어릴 적이 떠오른다.
우리 아이들도 어릴 적에 가끔 벼룩시장을 함께 한 적이 있었다. 독일에서는 아이들이 자기가 읽던 책이나 가지고 놀던 장난감 중에 더 이상 필요 하지 않은 것을 벼룩시장에 가져다 팔고 그 수익을 필요한 것에 쓰거나 저금하는 것은 아주 자연 스런 일이다
그래서 동네마다 아예 어린이 벼룩시장도 따로 있다.
어린이 벼룩시장은 학교 또는 교회에서 주관 하는 경우도 있고 동네 봉사 단체나 시에서 주관 하는 곳들도 있다.
곳에 따라 자리값을 내고 그것이 유기견 센터 등의 후원금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자리값 없이 미리 예약하는 것으로 참여할 수 있는 곳들도 있다.
어린이 벼룩시장에서는 손님도 어린이 판매 하는 이도 어린이다.
부모 들은 아이들이 가져갈 물건들을 차에 실어다 가져다주고 도와주기는 하지만 판매할 물건을 골라 챙기는 것부터 물건을 진열하고 때로 흥정하며 판매하는 것까지 벼룩시장 에서의 모든 것은 어린이들이 스스로 하게 둔다ㅣ.
벼룩시장이 열리는 날 아이들은 아침 일찍 여기저기 책상 같은 것 위에 또는 바닥에 피크닉 돗자리 같은 것을 깔아 두고 그 위에 물건들을 조로미 진열해 둔다
그리고 동전통도 잊지 않고 챙겨 간다. 1유로 2유로짜리 를 판매하다가도 바꿔줄 동전이 필요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미난 것은 어린이 벼룩시장을 하다 보면 우리 집만 해도 아이 셋이 모두 다 다르더라는 거다.
예를 들어 큰아이와 딸내미는 벼룩시장에 가지고 나갈 물건 챙기는 것부터 판매하는 것까지 모든 것이 달랐다.
남자아이 여자 아이 차이도 있지만 큰아이는 축구화 라든가 포켓몬 카드 중에 귀한 카드 라던가..
경쟁력 있는 주로 팔릴만한 물건들을 생각해 가며 담았다
그런데 딸내미는 지가 더 이상 필요 하지 않은 것들을 그냥 다 담았다 그러니 꺼내서 진열해 놓으니 다른 곳에서도 찾을 수 있는 것들이 많았고 여러 개를 팔아도 몇 유로 모이지 않았다.
그러니 결국...
어린이 벼룩시장에서 제법 판매 전략이 있던 큰아이는 가져간 물건들을 거의 모두 팔고 용돈 통장이 두둑해졌다.
그에 비해 딸내미는 여러 개 팔았어도 별로 남는 게 없어 나중에는 지가 사고 싶은 것과 다른 것을 맞바꾸기도 하고 용돈을 가불해 사고 싶은 것을 사기도 했다.
예를 들어 가지고 싶던 인형을 다른 아이가 10유로에 내어 놓았는데 아직 수익이 10유로 가 채 되지 않았던 딸내미는 지가 가지고 있던 책 여러권과 그 인형을 맞바꿨다.
보고 있으면 기특하기도 하고 웃음이 나기도 했던 어린이 벼룩시장을 통해 아이들은 경제관념도 생겨 나게 되고 놀고 나서 장난감을 잘 정리해 두어야 한다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
조금은 전략적인 구석도 있어야 한다는 것 까지도 말이다.
우리는 그 주말 오랜만에 찾은 꽃 상가 옆 벼룩시장에서 필요했던 커다란 화분은 구할 수 없었지만 새록 새록한 추억들을 한 아름 꺼내 볼 수 있는 재미난 시간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