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흥부네 김밥
얼마 전 생일을 맞은 엄마를 위해 아이들이 집에 다녀 갔다.
아이 셋 중에 둘은 이미 집을 떠나 각자 살아가고 있다.
한 지붕 아래 함께 살던 아이들을 하나 둘 낯선 곳으로 떠나보낼 그때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묘한 감정이 뒤엉켜 몇 날 며칠 깊은 잠을 이루기 어려웠다.
언제 이렇게 키웠나? 하는 대견함과 자고 일어나면 벌어지는 세상의 무서운 일들을 떠올리며 낯선 곳에서 혼자 어떻게 지내려나? 하는 걱정.. 30년 전 친정 엄니도 내게 했을 그 걱정 말이다.
그리고 다섯에서 셋이 된 허전함..
아이들은 엄마의 미리 당겨한 걱정과는 다르게 야무지고 씩씩하게 각자의 길을 잘 찾아 나가고 있다.
또 엄마가 허전할 새라 이렇게 생일이라 와 주고 부활절 연휴라 오고 여름휴가라 함께 하고 크리스마스이니 집으로 모인다.
올 가을이면 김나지움 10학년 우리로 고1이 되는 사춘기의 막내와 멍뭉이 나리만 있던 집에 아이들이 합류하는 날이면 우리 집은 금세 명절이 된다. 집안 분위기와 온도 차가 평소와 확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오기 전 이면 늘 그러하듯 설레는 마음으로 미리 방청소도 해두고 평소 아이들이 좋아하는 엄마표 음식들로 메뉴를 짜고 장도 넉넉히 보아 둔다.
그런 나 아이들과의 시간은 언제나 날아 갈듯이 빠르게 흘러간다.
이제 내일 이면 온다 했는데 돌아 서니 가야 할 시간이 코앞에 있다.
공휴일에 징검다리 휴일까지 보태 삼박사 일도 더 되었건만 메뉴는 반도 선보이지 못한 채 아이들은 어느새
다시 각자의 자리로 되돌아갔다.
냉장고 속 남은 식재료 위로 엄마의 아쉬운 마음이 얹어진다.
한 번에 왔다가 동시에 가고 나면 엄마가 더 허전해할까 봐 속 깊은 딸내미는 언제나 오빠가 오기 하루 전 먼저 집으로 왔다가 오빠가 가고 나면 하루 더 있다가 되돌아가고는 했다.
물론 오빠는 기차 타고 공항에 가서 비행기 타고 가야 하는 길이고 저는 기차만 타고 가면 되니 가능한 일일수도 있으나 학기 중이라 저도 바쁠 텐데 언제나 그렇게 마음을 쓴다.
아침에 짜장면에 탕수육을 브런치로 먹고 출발한 큰아들은 잘 도착했노라 연락과 함께
그 동네 사진을 보내왔다.
그 사진들을 보니 아침까지 같이 웃고 떠들었던 아이의 빈자리가 느껴진다.
그런 엄마의 마음을 금세 눈치챈 딸내미는 노트북을 들고 와서 한국 드라마를 보자고 켰다.
요즘 우리가 재밌게 보고 있는 드라마다. 닥터 차정숙, 내용은 욕하면서도 보게 된다는 얄미운 시어머니에 바람난 남편 골고루 세트로 들어 있지만 그 속에서 다시 자신을 찾아가는 주인공을 응원하게 되고 코믹한 장면들이 많아 웃으며 보게 된다.
한참 웃다가 아이에게 내일 아침 무엇이 먹고 싶으냐 물었다.
딸내미는 다음날 아침 기차를 타고 돌아가도록 되어 있었기에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아침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이는 큰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간단하게 하와이안 토스트가 먹고 싶다고 했다.
언젠가 엄마가 찍어 올린 사진을 보고 먹고 싶다고 하기도 했었지만 아무래도 이른 아침 시간이라 엄마의 수고를 덜어줄 마음인 것 같았다.
가면 또 혼자 밥 해 먹고 공부하느라 애를 쓸 터인데 한 끼 라도 더 엄마의 따뜻한 밥을 해 주고 싶었다.
새벽에 일어나서 뭘 준비하면 맛나게 빨리 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는 내게 남편이 말했다.
“아침은 지가 먹고 싶다는 하와이안 토스트 해 주고 김밥 도시락 싸주면 가서 먹으면 되잖아!"
아, 맞다 도시락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그저 집에서 하나라도 더 먹여 보낼 생각만 했지 도시락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렇게 가끔? 남편이 뜬금 없이 쏟아 놓는 아이디어 중에는 꽤 쓸만한 것들이 많다.
물론 자기가 할 건 아니지만 말이다.
우리 집 흥부네 김밥
그렇게 자기 전에 냉장고에서 재료 체크도 해 두고 김밥 도시락 싸서 보낼 통도 꺼내 두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새벽을 맞이했다.
토스트 빵 위에 햄을 얹고 파인애플 얹어 치즈 뿌려둔 것을 오븐 안에 넣어 두고 딸내미가 아침 먹으러 내려오기 바로 전에 불 켜고 구울 준비 해두었다. (하와이안 토스트가 궁금한 분들을 위해: 나를 위한 달콤한 아침 )
그리고 본격적으로 김밥 쌀 준비를 시작했다.
우리 집 흥부네 김밥 이라 하면.. 단무지와 당근이 빠진 김밥을 말한다.
그전날 냉장고를 확인해 보니 단무지도 없고 당근도 없었다.
그럼에도 김밥을 싸는 데는 큰 문제는 없다 단무지 대신 살짝 절인 오이 넣고 당근 대신
빨간 게맛살 있으니 말이다.
우선 밥을 고슬 고슬고슬하게 지어서 큰 통에 펴서 소금과 참기름으로 간을 한다.
이때 짜진 않지만 간이 맞는다 싶게 밥만 먹어도 고소하니 괜찮겠다 싶게 간을 해 둔다.
밥이 식고 있는 사이 오이를 물기 많은 가운데는 덜어 놓고 겉쪽으로만 길게 잘라서 식초, 소금, 설탕을 각각 1:1/2:1로 맞춰 풀어 둔 곳에 담가 둔다.
너무 오래 절여 두면 생오이의 생생한 맛이 사라지니 짧게 담갔다 건진다
그리고 게맛살, 소시지,를 오이처럼 길쭉길쭉하게 썰어 살짝 볶아서 준비한다.
큰 접시에 오이, 게맛살, 소시지를 담아 놓고 계란 세 개를 소금 한 꼬집 흰 후추 한 꼬집 풀어 지단을 붙인다.
노란 계란지단도 길게 잘라 담아 두면 마지막으로 어묵을 길게 썰어 간장 작은 술, 참기름 작은 술, 물엿 또는
요리당, 또는 꿀을 넣고 볶아 낸다.
간장이 들어가는 어묵을 마지막으로 해야 프라이팬 하나로 다 준비하고 설거지감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다섯 가지 많지 않은 재료가 모두 준비되면 김밥을 말기 시작 한다
재료가 평소 보다 조금 적게 들어가서 우리 집에서는 흥부네 김밥이라 부르지만 맛은 끝내준다.
왜냐하면 우선 밥에도 충분히 간을 해 주었고 양념된 어묵과 오이가 역할을 톡톡히 해 주며 빨간 게맛살과 분홍의 소시지가 본연의 건건한 맛으로 바쳐 주고 노란 계란 지단이 고소하게 어우러 지기 때문이다.
시간 맞춰 오븐에서 하와이안 토스트가 노릇노릇 맛나게 구워질 때쯤 딸내미가 커다란 가방 두 개를 가지고 내려왔다.
새벽부터 준비해 한상 가득 김밥을 싸고 있는 엄마를 보며 딸내미가 조금 놀란 눈치였다
김밥 여섯 줄을 한 줄 썰어 담고 깨 뿌리고 또 한 줄 담아 깨 뿌리고 4단쯤 담고 김밥 끝에 남은 자투리까지
꽃처럼 넣어 담으니 얼추 커다란 도시락 통이 꽉 찼다.
어쩌면 딸내미는 엄마가 싸준 김밥 도시락을 다음날까지 먹게 될는지도 모른다.
나는 딸내미에게 혹시라도 김밥이 남으면 냉장고에 넣었다가 다음날 먹을 때
프라이맨에서 살짝 데워 먹으라는 깨알 꿀팁도 주며 미소를 지었다.
새벽부터 준비해서 급하게 싸느라 굵기도 제각각인 김밥이지만 담아 놓으니 그럴듯하고 무엇보다 시장 보고 냉장고 채워 놓고 나서 보다 훨씬 마음이 든든해진다.
아이가 몇 시간이나 기차를 타고 가서 피곤할 텐데 밥 준비 하지 않고도 먹을 수 있으니 말이다.
손끝부터 집안 가득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솔솔 풍기던 아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