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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중희 Jun 05. 2023

라쿤 풍년이로구나


나른한 목요일 오후 였다 집에서 점심을 먹고 오후 진료를 위해 나섰다.

요즘 낮기온이 올라가는 날들이 많아 밥 먹고 나면 몽롱해지기 십상인 때다.

눈이 반쯤 내려온 채로 병원문을 열었는데 직원 GL이 급하게 나를 부르며 앞장서서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빠른 걸음으로 뒷따르던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가 앞서서 가고 있던 곳은 다름 아닌 3번 방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작은 개인병원이다 보니 세 개의 진료실을 번갈아 가며 쓰고 있다

그중 3번 방은 우리끼리 부르는 일명 Wintergarten 빈터가르텐 우리로 하면 온실 내식으로 번역

하자면 겨울정원이다.


겨울정원 방은 옆으로 길게 되어 있어 방을 몇 가지로 활용하고 있다.

첫 번째, 방 끝쪽에는 환자들 기록카드가 담긴 서류장들이 놓여 있고 기록보관소로 이용되고 있으며 둘째, 방 오른쪽 창가에는 진료 침대가 놓여 있어 가끔 누워서 혈액을 채취해야 하는 환자를 위해 사용된다.

셋째, 방 양쪽 끝으로는 의자들을 여러 개 놓아 백신 접종 이라던가 겨울에 갑자기 환자들이 밀려들 때 두 번째 환자 대기실로도 사용한다.

넷째, 방 왼쪽 끝에는 책상과 컴퓨터 인쇄기등으로 미니 사무실을 만들어 두었다.

그곳에서 주로 내가 세금 관련 또는 병원 회계 관련 업무 등의 일처리를 하고는 한다

다섯 번째, 아주 가끔 진료실이 부족할 경우 진료실 로도 사용한다.


이 다섯 가지 용도 중에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게 네 번째 업무 되겠다.

한마디로 평소에 내 사무실로 활용 중에 있다는 말씀 그런데 아직 오후진료가 시작

되지도 않은 시간에 직원이 갑자기 내 사무실에 무슨 급한 일이 있겠는가 말이다.


겨울정원 안에서 멈춰 선 GL은 창가에서 무언가를 가리켰다.

그리고는 "저기 좀 봐!"라고 했다.

처음에 나는 그녀가 무얼 말하려는지 알지 못했다.

그녀가 가리키던 손끝 방향 좀 더 정확히 설명하자면 창문 바로 너머 작은 나무 위에 무언가 작은 것이 움직이고 있었다

두 눈을 찡그려 자세히 들여다보니 작은 검은색의 털뭉치 같은 베이비 라쿤의 귀가 바람 부는 방향에 따라 쫑긋 거렸다.


오마이 갓뜨!

집에서 본 것으로도 부족해서 이제는 직장에서도 라쿤을 만나야 하다니 환장하겠네..

창문 너머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 가 아니라 창문 너머 확실하게 라쿤이 보이지요였다.


그런데..

라쿤의 만행을 겪어 보지 못한 사람들은 그저 귀여운 동물에 지나지 않았다.

GL은 동물원에서 보던 라쿤을 병원 담벼락 나무 위에서 보니 너무나 신기하고 재미있는 눈치였다.

물론 세상의 모든 베이비는 귀엽고 사랑스럽다

그러나 그 귀여운 것들이 그저 야생에 살며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다면 깜찍하기 그지없을 테다.


사실 야생동물 입장에서 보자면 야생의 생태계 사이에 인간이 끼여 들어 땅을 밀고 집 짓느라 기계소리에 난리 부르스를 떨며 자연생태계를 망가뜨리고 있는 것일 테니 그들의 입장에서는 원, 시끄러워도 이리 시끄러울 수가 있나 싶은 침입자 들 일 테지만 말이다.  

나는 귀엽지만 지붕을 헤집어 놓고 벽을 뜯고 해서 해마다 수리비로 방지템 비로 적게는 수십 수백 유로에서 많게는 수천 유로도 들여야 했던 일화 들과 사진들을 보여 주었다.

"어머나 너무 귀엽지 않아! 라며 깍깍거리던 GL은 그제야 입으로는 "그런 짓을 한다면야 더 이상 귀엽지 않지!" 라며 눈은 반짝이고 있었다.



직원 GL 이 점심시간에 촬영한 사진과 동영상을 내게 보여 주며 전한 라쿤 스토리는 대강 이러했다.

그녀가 점심시간에 요깃거리를 사러 마트에 다녀오는데 병원 앞마당에 출현한 라쿤 패밀리가 쭈루미 배수관을 타고 올라 가더란다.


그러다가 그중에 제일 쪼그만 미니 라쿤이 나무 위로 뚝 떨어져서 혼자 남았다.

그녀는 그 이야기를 전하면서도 "저 작은 라쿤이 혼자 계속 저러고 있으면 어쩌나!" 걱정을 하고 있었고

나는 원 별걱정 다하고 있네 하는 표정으로 "저래 봬도 제도 야생라쿤이야 조만간 지가 올라가던 지네 엄마가 와서 데려가거나 할 거야!" 했다.


왜냐 하면 내가 보기에 그 베이비 라쿤은 불안에 떠는 모습이 아니라 마치 휴양지에서 비치 의자에 누워 휴가를 만끽하고 있는 사람처럼 나무 위에서 햇빛 받으며 하품도 하고 여유 있게 드러누워 있더라는 거다.

나의 짐작은 직원이 보내준 동영상을 보니 더 확실해졌다.


위에 동영상을 보면 지붕 위에 올라간 세 마리의 라쿤이 보인다.

그중에 두 마리는 제법 큰 것으로 엄빠로 보인다.

그들은 아래쪽을 잠시 보다가 아빠로 보이는 라쿤이 "원 시원치 않기는 쯧쯧!" 하는 표정으로 성큼성큼 앞으로 나가고 뒤를 쫓는 엄마로 보이는 라쿤이

"아유 됐슈 어서 갑시다 이따 내가 후딱 댕겨올테니 걱정 마유! 저건 누구 닮아 저런가 몰러 그렇게 연습을 시켰는디 또 월척없이 떨어졌슈!"라고 하는 듯 보인다.

그리고 조금 작은 베이비 라쿤의 형제로 보이는 아이가 아련한 눈으로 나무 아래를 쳐다본다.(요 아이로 예상되는 아이를 나는 그다음 날 창가에서 만났다.)



그리고 다음 동영상을 보면 배수관을 타고 지붕 꼭대기 가까운 곳으로 올라간 라쿤들이 보이고

아래 울타리 너머 나무 사이에 보일 듯 말 듯 보이는 베이비 라쿤이 보인다.

마치 자기들끼리 의사소통을 하는 듯 보이는 이 장면은 지붕으로 올라간 엄빠 라쿤이

아래에 혼자 남은 베이비 라쿤 에게 "엄빠는 한잠 자고 올겨, 니도 거기 나무에서 자빠져 자고 있다 올라와 아님 우리가 겨 내려가서 대꾸 올 테니 걱정 붙들어 매고!"


그렇게 하여 혼자 남은 라쿤은 잘 있다가 그날 저녁 지붕으로 안전하게 올라갔다 (그 장면이 동네 인스타그램에 동영상으로 떴다! 알고 보니 이 베이비 라쿤 셀럽!)


그다음 날 나는 같은 장소에서 또 베이비 라쿤들을 만났다.

내 사무실 책상 모니터 바로 뒤 창문에서 바로 보이는 나무 위에 이번에는 두 마리의 라쿤이 서로 얼싸안고 있었다.

맨 위에 동영상에 나오는 아련한 눈빛 그 아이가 아마도 동생이 이번에도 기어 올라가다 또 떨어져서 함께 남아 준 듯했다.

이거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싶었다.

건물주가 따로 있으니 근본적인 대책과 걱정이야 그 사람의 몫이겠으나 이렇게 집에서도 직장에서도 라쿤을 만나게 되니 야생라쿤을 반려동물로 데리고 있는 느낌마저 들 지경이다.  


사진과 동영상들로 확인된 것 중에 중요한 사실 하나 결국 방지템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거다.

병원 건물 배수관 에도 더블로 방지템을 해 두었건만 이까 이것 비웃기라도 하듯 라쿤들은 타잔이 형님 하게

배수관을 나무 타듯 눈 깜짝할 사이 타고 올라가 지붕 위에 있었다.

결국 돈 들여 한 방지템들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고 그저 이 집이 라쿤이 자주 출몰했다는 사실만 인증했을 뿐이다.

아이고 두야~~! 커피를 내리 마셔도 머리가 맑아지지 않던 오후였다

뽀나스
보너스!
그리고  가지  우리 동네가 독일에서 야생라쿤의 본거지가  이유가 습니다.
북아메리카 등지에 서식하던 
야생라쿤 한쌍을 동물원에 기증하기 위해 데려 오던  공교롭게도 우리 동네 근처에서 잃어버려서 그때부터 독일 전역에 서식하게 되었어요.
 독일 야생라쿤의 본거지 이자 시발점이(가끔 발음을 세게 하고 싶어 진다.)  곳이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 카셀이라는 말씀!
카셀이 라쿤 도시 넘버원 이랍니다
별개  넘버원이지요
 우리 애독자 님이 댓글로 물어보셨던 "갸들은 집이 없나요?"
있습니다 있고 말고요.
원래 야생라쿤의 집은 숲과  그리고 강가 등입니다
공원 등에 서식하다 식량이 부족한 추운 겨울이나 출산을 위한 번식기에 주로 인가의 지붕  또는 다락방 등에 월세도  내고 세를 들게 됩니다.
갔던 호텔 매번 예약 하듯 같던 집을 계속해서 가는(예를 들어 김자까네ㅎㅎ) 이유는 그집 지붕 또는 다락방에서 라쿤이 다녀갔던 흔적 냄새 등으로  찾아 오고 그런 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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