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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중희 Jun 09. 2023

독일 대학 학생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6월의 어느 금요일이었다. 모처럼 남편과 둘이 대학 학생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독일에서 대학의 학생식당을 Mensa 멘자라고 부른다.

이전에 우리는 점심시간에 종종 병원 근처의 멘자에서 점심을 때우고는 했는데

팬데믹 사태가 터지고 나서는 약 3년간 가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는 가봐도 되겠다 싶기도 했고 그날은 요즘 한창 근육을 키우시는데 신경을 많이 쓰고 계신 막내가 방과 후에 친구들과 바로 피트니스를 갔다가 온다고 해서 집에서 만나기로 했기 때문이다.


보통은 병원 오전 근무 끝내고 집으로 가는 길에 13시 10분이면 학교 수업이 끝나는

막내를 찾아서 점심을 먹는다.(독일 학교 이야기는 다음번에...)

우리는 주로 집에서 점심을 먹는데 세 식구만 있을 때는 대부분 그전날 저녁에 먹고 남은 것들로 다음날 점심까지 먹는 경우가 많다


파스타가 남으면 치즈 뿌려 오븐에 넣어 그라탱을 해서 먹기도 하고 국에 밥 또는 카레 종류가 남으면 데워서 먹기만 하면 되고 김밥이 남으면 김밥전을 해서 먹고 전날 샐러드가 남으면 비빔밥을 해서 먹기도 한다.

물론 때로는 케밥이나 피자, 그릴 소시지 같은 것들을 오는 길에 테이크 아웃 해서 먹기도 한다.



덕분에 우리는 여유 있게 병원일을 정리하고 근처에 있는 대학 식당으로 향했다

독일 대학들은 우리처럼 캠퍼스  곳에 대부분의 과가 모여 있지 않고 단과대별 캠퍼스들이 나뉘어 각각 도시 전역에 여기 하나 저기 하나 흩어져 있다


예를 들어 우리 집 바로 근처에는 기계공학과 등의 공과대학들이 있고 길 건너편에서 시내 쪽으로 한참 걸어 내려가면 미대 가 나온다 그리고 시내에서 전차 두 전거 장을 타고 내려가면 대학 중앙 캠퍼스가 나온다.

또 병원 근처에는 수학과 생물학과 화학과 등의 이과 대학 캠퍼스가 있다.

그래서 Mensa 멘자 (독일의 대학 학생식당)들도 각기 나뉘어 있다.


우리가 학생이던 시절 살았던 도시 괴팅엔은 독일에서 대학도시로 유명한 곳이다.

때문에 학생들을 위해 마련된 기숙사, 멘자 또한 잘 되어 있기로 정평이 나 있는 도시 중에 하나다.

그래서 우리도 줄곧 아이들 키우며 학생들을 위한 가족 기숙사에 살았고 점심도 늘 학생식당 멘자에서 먹었다.


그때는 평일 동안 일주일 내내 중앙 멘자, 이탈리아 멘자, 대학병원 안에 있는 의대 멘자, 투어 멘자 등등 맛집 탐방 하듯 메뉴에 따라 멘자를 골라 다니고는 했었다.


그 시절 우리는 20대였고 젊은? 학생 부부 였다.

아이들이 태어나고 유모차를 몰며 우리는 주로 멘자에서 점심을 먹었다.

주변에 독일 친구들 중에서도 외국인 친구들 중에서도 아이들 키우며 공부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당연히 멘자도 아이들 데리고 오는 학생들이 많았어서 아이들과 멘자를 가는 것이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아마도 늦둥이인 막내 빼고  시절 우리 아이들 키우는데  할은 멘자 음식이 일조를 했을 게다.  

아기새가 어미새 에게 모이 받아먹듯 입을 벙긋 거리며 학생식당 밥을 오물오물 맛나게 먹던 아이들이…

다 자라 직장에 다니고 있고 다른 도시에서 대학 다니며 그때의 우리처럼 대학생으로 멘자에서 밥을 먹고 있으니 세월은 정말이지 눈 깜 박할 사이에 휙 하고 지나간다.


이과 캠퍼스 주차장에 차를 세워 두고 학생식당 건물 이층에 올라가니 익숙한 냄새가 솔솔 풍겨 왔다.

감자튀김, 독일식 돈가스 슈니첼 냄새가 나고 있었다.

아 익숙한 멘자 스멜~!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 우리는 독일의 세 개의 주 세 개의 도시를 돌아다녔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도 도시도 달랐지만 대학 학생식당에 가면 느껴지는 그 분위기는 어쩐지 비슷하다.

물론 시설과 메뉴 그리고 시대적 차이가 존재하지만 말이다.

남자들 군대 이야기 하면 나 때는으로 시작된다. 분명 요즘은 그예 전보다는 많이 달라졌을 군대다. 그럼에도 예나 지금이나 군대 짬밥은 짬밥이다 와 비슷한 느낌 이라고나 할까


그래오랜만에 들른 학생식당이 낯설지가 않다.

단지 앞서 걷고 있던 남편의 성성한 흰머리와 그때와는 조금? 달라지 뒤태가 그 앞에 걷고 있던 학생들 한 무리와는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는 것 빼고는 말이다.


우리는 옛날옛적의 추억들을 마치 어딘가 던져두었던 통발을 건져 올리듯이 떠올리며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이 생긴 식판을 들고 두리번거리며 메뉴를 골랐다.


그날의 메뉴는 세 가지였는데 메뉴 1은 감자와 콜리플라워 가 들어간 인도식 카레 음식 알루고비 메뉴 2는 감자와 당근을 섞은 독일식 야채 전과 크림딥 메뉴 3은 독일식 돈가스 슈니첼과 파프리카 소스에 감자튀김이었다.


나는 메뉴 2 남편은 메뉴 3을 골랐다

거기에 토마토 모자렐라 샐러드, 오이 양배추 샐러드를 옵셥으로 담고 후식으로 달달한 건포도와 견과류 올라간 요구르트를 담았다.

각자 푸짐하게 들고 간 식판을 계산대에 내려놓고 우리는 손님이에요라고 이야기하며 계산을 하려고 할 때였다.

(같은 음식이어도 학생, 교직원, 손님은 각각 가격이 다르기 때문이다.)


계산하시던 아주머니 직원이 현금이 아니라 카드를 달라고 했다.

아하 이제 현금을 받지 않고 카드만 쓰는 구난 하고 남편이 카드를 냈더니 아니 그거 말고 멘자 카드를 내라고 했다.


멘자 카드? 아니 언제부터?

옛날 옛적 우리가 학생일 적에는 멘자 식권을 미리 사두고 그것을 냈었다.

그런데 그 이후에는 학생들은 전자 학생증을 멘자 카드처럼 사용하고 있었고 손님들은 언제든 현금 계산이 가능했었다.

그런데 팬데믹을 지나며 손님들도 모든 계산을 멘자 카드로 하도록 시스템이 바뀌어 있었다.

이런 ~~! 조금 당황스러웠다. 식판 가득 들고 갔는데 계산이 되지 않는다니 말이다.


민망하기는 했지만 직원 아주머니의 친절한 설명을 듣고 식판 두 개는 한옆으로 치워 두고 복도로 나가 손님용 카드를 뽑아서 거기에 현금을 넣어서 들고 다시 멘자 안으로 들어왔다.


물론 처음에 어디다가 현금카드를 넣어야 하는지 카드 넣었다 뺐다 하는 거에 조금 헤매기는 했지만 말이다.

팬데믹 때 현금이 오가며 감염 위험이 높다는 것 때문에 모든 것을 카드화 하려고 시스템을 재정비했던 것 같다

카드에 현금을 넣는 것도 현금이 아니라 카드로 넣을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한마디로 클릭 클릭 해서 현금카드 넣고 원하는 액수와 비밀번호 넣고 결제하니 멘자 카드가 역에서 기차표 나오듯 덜커덩하고 나왔다.


어쨌거나 성공해서 계산을 마친 우리는 창가 넓은 곳에 앉아 식사를 했다.

이거이 얼마 만에 먹는 멘자밥이던가...

요즘은 물가가 많이 올라 멘자 가격도 만만치 않게 올랐지만 아직도 학생들에게는

밖의 밥보다 훨씬 싸고 실용적이다.

그날 제일 비싼 메뉴가 남편이 골랐던 독일식 돈가스 슈니첼이었는데 손님에게는 9유로 70센트 학생들에게는 4유로 50센트 한화로 약 6천300원 정도 하니 괜찮지 않은가?


마치 지난 세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학생들은 이전과 다름없는 모습으로 웃고 떠들며 친구들과 맛난 점심을 먹고 있었다.

이 평범한 일상을 되찾기 위해 전 세계가 그동안 얼마나 애써 왔던가...

새삼 마스크 없이 별다른 걱정 없이 이전과 다름없는 이 일상의 작은 찰나가 감사하기 그지없었다.


문득 저들은 무슨 꿈을 꾸고 있을까?

궁금해졌다

저 싱그러운 젊은이들 가운데는 수학교사가 되는 사람도 있겠고 화학, 생물 관련 연구소로 가는 이들도 있을 테고 제약회사나 기타

관련 업체로 가는 이들도 이겠지…


우리도 저들처럼 매일 맹자밥을 먹을 때 남편은 연구에 큰 성과를 내 인류 역사상 큰 획을 긋고 인류에 보탬이 되겠다. 그래서 노벨상 그까이거 주면 좋고 하는 원대한 꿈을 꾸었다

나는 얼른 애들 키워 놓고 작품 활동 열심히 해서 도쿠멘타를 포함해 비엔날레 (세계 미술전시회)에 초대되고 인터뷰도 들어오는 대작가 가 되겠다 하는 꿈을 꾸었다


그러데 지금...

남편은 개인병원을 내서 인류에 한 획 까지는 아녀도 동네 사람들 건강을 돌보아 주며

어쨌거나 인류에 보탬이 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아이들은 얼른 커줬고 지금은 그림이 아닌 병원일을 하고 있고

작품이 아닌 요리로 인터뷰를 했으며 글쓰기로 브런치에서는 어쨌든 작가다


사람들은 말한다 지금은 100세 시대라고...

20대에 그린 밑그림 과는 조금 다르기도 하고 엉뚱 하기도 한 인생의 그림이 그려졌다

우리는 둘 다 50대고 인생의 반을 왔다 전반전에는 이런 그림이 나왔으니

후반전에는 어떤 그림을 그릴지 밑그림을 상상해 볼 때가 온 것 같다

마음은 아직 대학 파티 포스터를 보면 설레고 대학 학생식당의 학식이 여전히 맛난 우리는

이제 인생의 전반전을 지내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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