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뎅이 닥쳐나 아가리 다물어나
30년 살아도 모른다
우리나라 속담에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알 수 없다는 말이 있다
병원에서 일하며 정말 수시로 떠오르는 속담이다
이 얼마나 사람에 대해 허를 찌르는 표현 이던가 사람의 본성에 대해 이보다 더 깊이 파고드는
말을 아직 찾지 못했다.
하루에도 연령대 다양한 수많은 독일 사람들과 만나며 독일땅에 30년 세월을 살고 있지만
나는 여전히 독일사람들을 잘 모르겠다.
아마도 내가 알고 있던 또는 겉보기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가진 이들을 자주 마주하게 되기 때문일 게다
평소 독일 사람 하면 조용하고 인내심 강한 것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울 친정 엄니도...
"그 동네는 마트에서 계산줄이 길어도 할머니들이 동전 하나하나 세느라 하세월 이어도
뭐라 하는 사람 하나 없더라 사람들이 참 양반이야"라는 말씀을 자주 하신다.
마트에서 또는 길에서 아이가 떼쓰며 뒤집어지게 울고 뒹굴며 드러누워 바닥청소를 해도
차근차근 말로 조지는 엄마들을 자주 본다.
어찌나 인내심들이 강한지 보고 있으면 나 같았으면.. 벌써… 소리가 절로 나온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병원 에만 오면 그 인내심이 출장을 가버리는지 알 수가 없다.
물론 끝까지 양반인 분들이 더 많다
게 중에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병원을 한번 헤집어 놓을 때마다 번번이 놀라게 될 뿐이다
지금이야 처음 그런 일을 만났을 때 처음처럼 쇼킹 하진 않지만 여전히 "아니 독일 사람 맞아? 뻔히 알면서 왜 이러는 건데?" 싶을 때가 종종 있다.
사람이 아프다 보면 체면 따질 여력도 없고 다른 이를 배려할 여유도 잃게 된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런 이유를 차치하고라도 이건 아니지 싶을 때가 있다.
지난 화요일에 일이다.
늘 그러하듯 아주 평범한 오후진료 시간이었다.
다른 게 있다면 맛난 커피와 간식으로 스트레스 지수를 그나마 조금쯤 낮춰둔 날이었다 고나 할까?
병원 회계세무 관련된 서류들을 나누고 정리해서 스캔하고 파일을 만들고 데이터 함에 저장을 했다
그리고 이제 데이터를 회계세무 회사 담당자에게 보내는 일만 남았는데 컴퓨터에 문제가 생겼다.
자그마치 7개월 치의 자료였다
인터넷 그리고 컴퓨터와 키보드, 마우스의 작동은 모두 정상 적이었다.
시스템의 문제는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뭐가 문제인가? 싶어 우리 병원에서 사용하고
있는 소프트웨어 회사 핫라인으로 전화를 해서 문제를 찾고 있었다.
전화통 붙들고 이렇게 저렇게 컴퓨터 안에서 파일을 가지고 씨름하고 있는데 어딘가 에서 날카로운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누군가 소리소리 지르는 고함 소리가 들리고 병원 문이 부서져라 닫히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나는 혹시나 응급이 터졌나 싶어 통화하던 이에게 다시 통화 하자는 말과 함께
병원 앞으로 뛰어 나갔다.
직원들에게 무슨 일이냐? 헤라클레스야?(응급상황을 이야기하는 우리끼리의 암호)라고 물었더니..
다들 기막힌 얼굴로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고 있었다.
이게 대체 뭔 일이란 말인가
내방은 우리 병원의 가장 끝방이다 문 닫고 전화통화를 하고 있으면 보통 밖에 상황이 잘 들리지 않는다.
그런데 전화통화 중인 내 귀에 또렷이 들렸다는 것은 누군가 지랄난방을 떨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다
지랄도 풍년이다
우리 병원 직원들 중에 막내인 G가 "그게 어떻게 된 일이냐면.. 을 시작으로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문제의 그 소리는 방금 진료실 2에서 진료를 받았던 여자 환자가 나가면서 난리를 치며 낸 소리였다는 거다.
진료실 2? 아~! 기억난다.
띠띠띠... 통화 중 을 알리는 소리가 계속 울리는 전화기를 들고 직원 휴게실에서 커피 한잔
뽑아다가 내방으로 들어가던 복도에서 진료실 2번 방에 젊은 여자 환자가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30대 초반으로 보이던 그녀는 길 가다 흔히 마주치는 전형적인 독일처자 얼굴을 하고 있었다
금발머리를 얌전히 틀어 올리고 검은색 롱코트를 입고 씩씩하게 진료실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걸음걸이나 환자의 상태로 보아 감기 환자 거나 혈액 검사 후에 설명 들으러 가는가 보다 했다
그런데...
멀쩡히 진료실에 들어가 진료를 받던 환자는 원장선생님이 종합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 보라고 하자
그만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는 거다.
이유는 종합병원에 가면 오래 기다려야 해서 그게 싫다는 거였다.
지난번에도 6시간 기다렸다며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더란다.
아니 누군들 기다리고 싶겠나..
어디나 그러하겠지만 독일 종합병원에 가면 때로 오래 기다려야 하기도 한다.
온 순서대로가 아니라 급한 순서 대로이니 어쩔 수 없는 거다
생명이 오가는 응급한 환자를 먼저 진료해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니 말이다
말도 안 되는 환자의 생떼에도 인내심 많은 원장선생님이 웃으며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나 그럼 병원을 바꾸겠어요!"라고 소리 지르며 진료실을 박차고 나갔단다
그럼에도 인내심 만렙인 원장쌤은 친절하게도
“네 원하시는 데로 하세요 그래도 종합병원 가셔서 검사는 꼭 받아 보도록 하세요"
라는 말을 남기고 다른 진료실에 들어갔고
그 환자는 병원 사무실 앞에서 이병원을 고소한다느니 어쩐다느니 하며 악을 악을 쓰고는 문짝을 부수듯 닫고 나갔다는 거다.
지나가다 지켜본 다른 환자들도 우리 직원들도 미친 거 아니야? 하는 표정이 되었다고 한다.
종합병원 가서 검사받아 보라고 했다고 기다리기 싫다며 고소한다고 떠드는 여자가 제정신으로 보일리 만무하지 않은가.
그 진상환자의 꼴갑이 어이없기는 했으나 종합병원 검사가 필요하다는 의사 소견서를 두고 갔길래 직원 C가 그걸 가져다주려고 뒤따라 나갔단다.
"환자분 소견서 가져가셔야죠"라고 부르자
훽하고 뒤돌아본 그 환자가 희번덕거리는 눈깔로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종합병원 가서 검사받으라면서요 환자의 몸상태가 이지경이면 병원에서
응급차를 불러서 이송해줘야지 않나요?"
우리 병원에서는 그런 검사시설이 없으니 종합병원 가서 검사를 받으라고 했지 누가 응급상황이라고 했나?
2년 전부터 아프다 말다 했다며.. 어제부터 아픈 것 같다며..
이지경 이라니 언제부터 길길이 날뛸 수 있는 상태의 환자를 이지경 이라고 표현했던가?
직원 CB는 말도 안 되는 환자의 생떼에 짜증이 나기는 했으나 차분히 이야기했단다.
"응급차는 아주 응급한 상황이 아니면 부를 수 없어요!"
그러자 그 환자가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해서는 쌍욕을 날렸다고 한다.
여기서부터는 의견이 분분하다.
직원 누구는 그녀가 "주뎅이 닥쳐"라고 소리를 질렀다 하고 또 누군가는
"아가리 다물어!"라고 소리를 질렀다고 했다.
주뎅이나 아가리나 뭔 차이가 있겠는가 마는 확실한 건 친절하게 소견서까지 가져다주는 이모 뻘은 될 직원에게 쌍욕을 했다는 거다.
미쳐도 곱게 미쳐야지 소리가 절로 나왔다
우리 병원 에도 가끔 주차장으로 삐뽀 삐뽀 요란한 사이렌을 울리며 응급차가 들어온다
그럴 경우 생명이 오락가락할 만큼 응급 상황인 것이고 환자를 시간 지체 없이
바로 종합병원으로 이송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아까 그 환자처럼 병원 문이 부서져라 닫고 빽빽 소리를 지르며 제 발로 돌아다니는 사람은 누가 봐도 응급한 상황이 아니다.
무슨 명목으로 응급차를 부른단 말인가 검사는 받아야 하는데 기다리기 싫어하는 환자가 있으니 데려가 달라고?
그녀는 그야말로 오늘 억세게도 운이 좋았다 만약 내가 딱 그때 전화통화만 하지 않았더라면..
업무 방해죄로 고소하겠다는 소리는 내 입에서 나왔을 것이다.
또 빙그레 웃으며 미친 척하고 씨부리는 데는 내가 선수가 아니던가
말하는 족족이 따져서 식겁하게 해 주었을 것인데 말이다
아깝다 ..아까비.. 를 연발하며 나는 못다 한 말을 허공에 쏟아 냈다.
"아니 응급차가 택시니? 부르면 누구나 타고 갈 수 있게? 그시꺼먼 속을 모를 줄 알고
병원에서 응급차 타고 바로 종합병원으로 직행해서 기다리지 않고 검사받고 싶었냐?
이야~ 양심도 없다! 병원에서 부른 응급차가 뭐 알라딘의 요술 양탄자냐
눈 깜짝할 사이에 가고 싶은 곳에 맘대로 도착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