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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중희 Jul 19. 2024

영어가 몸부림 치던 날

돌아온 온리 잉글리시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려는 어느 힘찬 월요일 오전의 일이다.

오전 중에 끝내야 할 서류가 있어 정신이 없는데 직원 하나가 헐레벌떡 내 사무실에 노크를 했다.

"온리 잉글리시 또 왔어!"

나는 젠장 소리가 절로 나왔지만 빠른 걸음으로 접수처로 향했다.


지난번에 몸살감기로 내원 한 와이프를 따라왔던 남자다.

그날도 온리 잉글리시를 외치던 그 남자와의 만남은 이러했다.

접수처 유리 앞에는 건장한 남자 한 명과 작고 마른 여자 한 명이 서 있었다.

무슨 일이냐 물었더니 남자가 대뜸 "너는 영어 할 줄 알아?"라고 물었다.

옛날 같았으면 어브 콜스를 외쳤겠으나 점점 비루 해져 가는 나의 잉글리시를

잘 알고 있던 터라..,

예전에 티브이 세제 광고에서 나오던 것처럼 손가락 두 개로 요만큼의 두께를 보여 주며 소심하게

"쪼끔 하는데 “..라고 했다.


그랬더니 유창한 영어로 자기 마누라가 며칠 전부터 어디가 어떻게 아팠고 평소에는 어디가 안 좋았고 등등

그녀의 일생을 풀어 대려고 하는 게 아닌가.

나는 지금 가장 안 좋은 것만 이야기해 보라며 옆에 서서 눈만 깜박이는 여자에게

유리 칸막이 사이로 눈을 맞췄고 그제야 환자는 머리가 아프고 목도 아프고 힘이 없고 등을 이야기했다.


혹시나 해서 코로나 테스트는 해 보았냐고 하니 음성이 나왔다고 했다.

그럼에도 우리 병원은 노인 환자들이 많으셔서 감기 증상이 있는 사람은 아직 마스크 착용을 해야 한다고 친절하게 마스크를 건네주었다.

그렇게 마스크와 함께 접수를 마친 두 사람을 환자 대기실로 들여보냈다.

영어를 잘하는 편인 원장쌤 과의 진료가 꽤나 만족스러웠던지..

그날 부부는 진료를 잘 마치고 씨유 어갠을 외치며 갔다

그런데 그놈의 씨유 어갠이 요로코롬 빨리 올지 몰랐다

우리 병원 주차장 (대문사진)과 출입구

어디나 비슷하겠지만 독일 사람들은 영어를 잘하는 사람들은 정말 잘하고

못하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못한다.

일단은 사람마다 다르니 사람 차이이고 다음은 교육 과정이 달라서 그렇다. 

독일에서는 초등학교 4학년에 이미 인문계 또는 상업계로의 진학을 결정한다.

(독일에서는 초등학교 4학년이 입시생 brunch.co.kr/@joongheekim/460)


일찌감치 직업 교육 쪽으로 빠진 아이들 중에는 영어를 힘들어하는 젊은이들이 생각보다 많다.

그건 교육목표 와 환경이 달라 그렇다.

상업학교나 직업학교에서도 영어를 배우지만 그 후에 이루어지는 직업교육 아우스빌둥은 아무래도 독일 위주로 되어 있어 호텔 관광 쪽을 제외하고는 영어를 사용할 일이 별로 없다.

그에 비해 대학 내에서는 외국에서 온 교환학생들 뿐만 아니라 교환교수 들도 자주 만나게 된다.

그래서 독일 대학 교수와 스텝들 중에도 영어로만 의사소통이 가능한 이들도 자주 만나지고 또 대학생 들은 외국에서 학기를 이수할 기회가 많다.(Auslandssemester)

그렇다 보니 영어는 기본이고 제삼 외국어인 프랑스어, 스페인어 등을 원어민 처럼 하는 학생들도 많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그럴 기회가 적었던 사람들은 영어가 아무래도 불편하다

특히나 빠르게 많은 말을 쏟아 놓을 때는..

우리 병원 간호사들도(엄밀히 말하자면 의료보조인) 그렇다

독일의 의료보조인 MFA

멀쩡히? 인터넷 도 잘하는 젊은 친구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영어로만 씨부려 쌌는 사람들이 전화를 해 오거나 병원에 찾아오면 일단 겁을 먹고 저스트 모멘 플리즈! 를 부르짖으며 나를 불러대기 바쁘다.

독일어나 영어나 뿌리가 같은 라틴어이다 보니 같은 단어를 발음만 달리 하는 경우도 많고  

알아듣기는 나 보다 훨씬 나을 텐데도 말이다.


특히나 요즘 병원에 오는 환자들 중에는 대학에 연구원으로 나온 사람들, 기업에 파트너로 온사람들 교환학생들 등등 온리 잉글리시가 많다.

게 중에는 영어도 독일어도 의사소통이 되지 않아 번역엡을 돌려야 하는 때도 있고 말이다.

온리 잉글리시가 우리 병원에 오는 날이면 그야말로 내 시원찮은 영어가 몸부림치는 날 되겠다.

사실 내 부족한 영어가 우리 직원들보다 나을게 뭐가 있겠는가

단지 내겐 그들보다 살아온 시간이 많다 보니 본능적인 눈칫발과 대충 씨부려도 당당할 수 있는 뻔치가 있을 뿐이다.


우리 병원 접수처

그날 그 환자는 혼자 왔지만 처음 우리 병원에 왔던 날처럼 온리 잉글리시로 다큐를 찍으려 들었다.

나는 빗발치는 잉글리시를 뚫고 뭐가 지금 제일 불편하시냐? 물었다.

그는 혈압약을 먹고 있는데 아무래도 약이 잘 듣지 않는 것 같다며 불편을 호소했다.

환자를 진료실로 안내하고 바로 혈압을 쟀다.

정상 혈압보다는 조금 높게 나왔지만 환자가 생각하던 것만큼 드라마틱하지는 않았다.

진료실에서 원장선생님 에게 진료를 받고 나온 온리잉글리시는 세상 밝은 표정으로

다음 진료를 예약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컴퓨터 마우스로 진료 칼렌더를 넘기며 모니터를 훑었다 그리고 환자에게 오전이 좋으냐 오후가 좋으냐 물었다.

그는 오후가 좋겠다고 이야기하고 나는 예약이 비어 있는 오후 진료 시간들을 찾다가

목요일 오후 5시라고 이야기해야 할 것을 그만 수요일이라 해 버렸다.

머리로는 떨스데이였는데 주둥이에서 웬일인지 왠즈데이가 발사되어 버린 거다.

말하면서도 아차차 했었는데 그 순간 직원 G 가 독일어로 말했다

"우리 왠즈데이에 오후 진료 없잖아!"


그때였다. 지금까지 온리 잉글리시를 구사하던 환자의 입에서 독일어가 쏟아졌다.

"나는 수요일도 목요일도 괜찮아요 그런데 일을 해야 해서 시간이 오후여야 돼요!"

순간 나는 당황해서 제법 올라간 목소리로 말했다 "독일어 할 줄 아네요!"

그는 지난번에 내가 그랬듯이 쑥스러운 듯 손가락 두 개를 작게 내밀며 "조금 할 줄 알아요!" 했다.

기가 막혀서 헛웃음이 터졌다.

그의 독일어는 조금이 아니었다. 나의 몸살 하는 영어보다 나았다.

젠장 그럼 왜 영어로 씨부렸냐 여러 사람 편하게 처음부터 그냥 독일어로 하지!

나는 무안한 얼굴을 애써 숨기며 말했다

"당신 독일어가 내 영어보다 훨씬 나아요!"

그랬더니 온리 잉글리시는 호탕하게 웃으며 독일어로 말했다

"그럴 리가요! 다음 진료 때 만나요!"

나는 영혼 없이 손을 흔들어 주면서 속으로 외쳤다

그래 온리 잉글리시! 다음번엔 독일 쏘시지 더 먹고 와서 독일어로 하렴!

아니면 내가 혓바닥에 버터 잔뜩 바르고 와서 서프라이즈 한 잉글리시 할끼다!

영어가 몸 부림 치던 날이었다.

우리 병원 환자 대기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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