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감사가 마음을 움직인다
12월 31일이었던 바로 어제 이제는 작년, 지난해가 되어 버린 2023년 마지막 날의 일이다.
지난해는 31일이 일요일이다 보니 그전날인 토요일 저녁까지 시장을 모두 보아 두어야 했다.
새해를 맞이할 그해 마지막 날을 독일에서는 Silvester 질베스타 라 부른다
질베스타가 되면 우리 집에서는 언제나 Raclette 라클레테 또는 퐁뒤 Fondue를 먹는다.
라클레테는 불판 안에 작은 팬을 넣어서 미니 피자처럼 구워 먹는 요리다.
작은 팬 안에 감자, 바나나, 계란, 고기, 생선, 새우 등을 각종채소 와 함께 넣고 그 위에 치즈를 올려서 구워 먹는 요리다.
퐁뒤는 동그란 냄비 같은 곳에 치즈를 걸쭉하게 녹여서 작은 꼬챙이처럼 생긴 것에 빵, 고기, 채소 등을 꽂아서
녹은 치즈를 묻혀서 먹는 요리다.
치즈가 왕창 들어가는 요리들이고 칼로리가 엄청나지만 치즈가 익어 가는 시간 가족들 또는 친구들과 두런두런 이야기 나누며 먹기에 아주 좋은 요리들이다.
그래서 우리 집은 해마다 그해 마지막 날인 질베스타가 되면 새해를 기다리며 이 요리들을 먹고는 한다.
어느 때는 라클레테만 해서 먹기도 하고 또 어느 때는 퐁뒤만 먹기도 하고 두 가지 다 먹기도 하는데
올해는 남편이 빨간색에 예쁜 퐁뒤 그릇을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아서 두 가지 다 하기로 했다.
그런데...
그 전날 어디를 다녀오느라 시장을 조금 늦게 가게 되어서 바게트 빵을 사지 못했다.
두 요리에 꼭 필요한 빵인데 말이다.
일요일 아침 일찍 우리는 자주 가는 주유소로 가 보기로 했다.
마트와 상점들이 문을 닫는 독일에서는 일요일 뭔가 급하게 필요할 때 갈 수 있는 곳이 주유소다
(독일 주유소가 궁금한 분들을 위해: 독일은 편의점 대신 주유소)
다른 주유소 보다 여기는 커피가 일단 맛나고 빵도 종류가 많다.
혹시나 바게트빵도 있을지 모른다 싶어 이곳으로 향했다
보통의 일요일이었다면 군데군데 오전만 열고는 하는 빵집으로 갔겠지만 질베스타에 문을 연
빵가게는 좀처럼 찾기가 어렵게 때문이다.
주유소 안에는 지금 막 오븐에서 꺼내 놓은 고소한 냄새의 작은 빵들과 크로와 상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아쉽게도 아무리 둘러보아도 바게트 빵은 없었다.
그래, 없으면 굽지 뭐~!
라클레테와 퐁뒤는 재료들을 썰어야 하는 게 일이지 특별한 조리 과정들이 적기 때문에 그래도 시간적 여유가 많은 요리다.
새해맞이 축하 케이크도 구워야 하고 바게트빵도 구워야 해서 오븐이 바쁘긴 하겠지만 요리 좋아하는 막내아들도 옆에서 돕기로 했으니 괜찮다
모처럼 남편과 주유소 안 카페처럼 꾸며둔 곳에서 커피를 마시며 2023년을 돌아보았다.
우리가 지난 온 시간들을 돌이켜 보니 힘들었던 순간들도 많았지만 그래도 좋았던 일들과 감사한 일들이 더 많았다.
의미 있는 커피 타임을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온 우리는 바게트 빵을 굽는 것을 선두로 집안 청소와 정리도 하며 새해를 맞을 준비를 했다.
바게트 빵을 구워 두고 점심에 따근한 다시 국물에 식구들과 잔치국수를 해 먹고 오븐에는 케이크를 굽고 있었다.
냄비 두 곳에는 보글보글 물이 끓으며 감자 그리고 계란을 삶고 있을 때였다.
불현듯 들고 다니는 작은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가방이 보이지 않았다. 보통 가방을 놔두는 현관 앞 옷 거는 곳에도 없고 소파옆 또는 식탁 의자에도
집안 그 어디에서도 나의 까만 작은 배낭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자동차 열쇠를 들고 혹시나 차에 뒀나 살펴보았다 그러나 가방은 없었다.
그 순간 거짓말처럼..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아침에 갔던 주유소에서 커피 마실 때 어깨에 걸려 있던 가방을 살포시 벗어 의자에 걸어 두었던 것이 떠올랐다.
오 마이 갓뜨~!
급하게 남편을 불렀다 "여보야 내 가방 어딨지?"
남편은 나의 급한 목소리에도 자기 할 것 하며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야 모르지 아까 네가 주유소 갈 때 들고 갔잖아 그 후에는 나도 모르지!"
다시 주유소로 향하는 길 등에서는 식은땀이 흐르고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독일에 살면서 가방 한번 지갑 한번 잃어버린 적이 있었는데 단 한 번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 번은 아이들과 맥도널드 갔다가 가방을 두고 집에 가던 길에 바로 생각이 나서 찾으러 갔는데
그 몇 분 사이에 가방은 사라졌다.
직원들에게도 그 옆에 앉아 있던 다른 사람들에게도 물었지만 아무도 알지 못한다고 했다
또 한 번은 지갑만 들고 바겟스키라는 바게트샌드위치 가게에 샌드위치 사러 갔다가 주문한 샌드위치 나오는 시간까지 커피를 마시며 신문을 읽다가 기다렸다.
주문한 샌드위치가 나오자 테이블 위에 얹어 놓았던 지갑은 홀라당 잊어버린 체 가게문 열고 길거너 자동차 파킹한 곳으로 향했다 그러다 앗차! 하고 다시 왔던 길을 돌아 뛰었다.
바로 갔는데 테이블 위는 깨끗했다. 그야말로 돌아서자마자 지갑은 없었다.
그 덕분에 신분증부터 의료보험 카드 그리고 모든 은행 카드를 정지시켜 두고 새로 발급받아야 해서 여기 갔다가 저기 갔다가 해야 했고 한참의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비로소 그전과 다르지 않은 일상을 살아갈 수 있었다.
그 두 번의 경험을 통해 독일에서 지갑을 잃어버리면 얼마나 시간이 걸리고 여러 가지 귀찮은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제대로 알게 된 셈이다.
그러니 머릿속으로 상세한 그림이 그려지며 가슴이 쿵쾅 거리며 불안이 엄습해 왔다.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내가 가방을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몇 시간이나 지났는데 그게 아직 남아 있을까? 그 주유소 커피 마시는 자리와 마주 보이는 곳에 돈 넣고 하는 작은 게임기 두대가 있다 그곳에서 아저씨 또는 할아버지들이 여기 한 명 저기 한 명 앉아 계셨는데...
그중의 누구는 눈도 빨개져서는 전투 적으로 게임을 하고는 있었는데...
혹시라도.... 하는 생각의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가지를 치고 있었다.
거기다...
이번 가방에 들어 있던 지갑 안에는 독일 카드들 뿐만 아니라 이번 한국 방문 때 새로 발급받았던 한국 카드들과 주민등록증까지 들어 가 있어서 일이 더 복잡하게 돌아 가게 생긴 거다.
독일 카드 들이야 바로 신고하고 정지를 시키면 되지만 한국 거는 어떻게 한다는 말인가
점점 걱정이 눈덩이처럼 불어 나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머릿속이 복잡해서 환장할 지경인데...
그 옆에서 남편은 손으로는 운전대를 잡고 입으로는 "그러게 뭐 하러 가방을 들고 갔느냐, 가져갔으면 챙겨야지 요즘 깜빡깜빡하는 게 일상인데 뭘 믿고 의자에 가방을 걸어 뒀느냐!" 등등 마누라의 빡침 게이지만 올라가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말들을 해대고 있었다.
나는 그런 남편의 타박을 귓등으로 흘리고 머릿속으로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현금도 들어 있던 가방을 다시 찾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러나 주유소 안에는 독일에서는 드문 CCTV가 도배되듯 설치되어 있다.
다행히 내가 앉았던 곳에서 최소한 두 개 이상의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었을 거다.
누군가 가방을 가져가는 모습이 찍혀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 한들 그 영상을 당장 보여 줄리 만무하다.
어디나 그러하듯 개인이 업체의 영상을 보기 위해서는 합당한 법적 근거가 있어야 한다.
그렇다는 것은 먼저 경찰서로 가서 도난 신고를 해야 한다.
새해 첫날부터 경찰서에 가서 신고를 해야 한다. 생각하니 심란하기 그지없었다.
새해부터 다른 곳도 아닌 경찰서를 들락 거려야 하다니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 일단 확실한 확인이 필요했다.
주유소 문을 열고 들어 가서 아침에 앉았던 자리를 눈으로 훑었다
역시나 가방은 걸려 있지 않았다.
내가 앉아 커피를 마시던 자리에 낯선 아저씨 한분이 앉아 커피를 마시고 계셨다.
머릿속으로 세세히 정리한 시나리오 대로 나는 직원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자초지종을 설명할 준비를 하고 큰 숨을 쉰 후 차례를 기다렸다.
그 몇 초가 며칠이 지난 듯했다.
내 순서가 되어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하는 직원에게 "오늘 아침에 왔었는데 저기서 커피 마시다가...."
이야기를 꺼내 놓기 시작했다.
그런데 직원이 너무 반가운 목소리로
"아 맞아요 이거 손님 것 맞죠?" 라며 카운터 아래쪽에서 내 가방을 꺼내 주는 게 아닌가
오 할렐루야~! 정말이지 다시 찾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도 하지 않았다.
나는 "진짜 너무 고마워요 가방을 두고 온 것이 기억나고부터 얼마나 마음이 힘들었나 몰라요!"라고 했다.
그러자 다부진 체격에 야무진 말투의 직원이
"그럼요 카드들도 그렇고 신분증도 그렇고 잃어버리고 나면 여러 가지 힘들죠~!
창가 자리에 가방은 남아 있고 손님이 안보이시길래 이따 분명히 다시 찾으러 오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라고 했다.
그렇게 긴장이 풀리자 내 안에 감사한 마음이 물밀듯이 흘러들었다.
직원 입장에서야 남이야 가방을 두고 갔던 누군가 그 가방을 가져갔던 사실 자기 일은 아니지 않은가.
관심을 두지 않고 몰랐다 한들... 잊어버린 내 탓이지 남탓할 일도 아니고 말이다.
그런데 그걸 챙겨 둔 마음이 너무 고마워 내입에서는 연신 감사의 인사가 쏟아졌다.
"가방을 찾을 수 없었다면 새해부터 경찰서부터 가서 신고하고 카드들 정지시키고 재발급하고 생각 만으로도 머리 아픈 일들이 줄 섰을 텐데 덕분에 이렇게 찾을 수 있어서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밝은 갈색의 머리를 찰랑찰랑 흔들며 밝은 미소를 머금은 직원은 이렇게 이야기했다.
"언젠가 손님처럼 가방을 잃어버리고 두고 간 손님이 또 있었어요 그날 우연히 가방을 찾아 드렸는데
그분이 너무 감사해하는 모습이 잊히지가 않아서 그때부터 누군가 뭔가를 잊고 가시면
항상 잘 챙겨 둔답니다
여기서는 뭔가를 잃어버리는 일은 생기지 않을 거예요!"
마음속 깊이 짙은 카푸치노 향 같은 진한 감동이 스며들었다. 우리가 살면서 작은 일들에 당연하게 생각하고 감사하는 것을 잊고 살 때가 많지 않은가
누군가의 그 작은 감사 덕분에 나는 가방을 다시 찾을 수 있게 된 셈이다.
새해 에는 작은 것에도 감사하고 살아야겠다.
그 마음들이 흐르고 흘러 내가 남긴 작은 감사들이 또 다른 누군가의 감사를 낳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To 독자님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새해 첫날부터 경찰서를 오갈 뻔 한 김자까 인사드립니다.
그 직원이 너무 고마워서 좀 전에 작은 선물을 전달하고 와서 이 감동이 옅어지기 전에
얼른 글 하나 써서 올립니다.
2024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울 독자님들 올 한 해도 언제나 건강하시고
감사가 넘치고 행복이 가득하시기를
바랍니다.
독일에서 대빵 큰 파이팅! 함께 쏘아 올립니다.
독일에서 김중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