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살면서 단 한 번도 운동을 잘해본 역사가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내 기억에 울아버지는 중년의 나이에도 사이클 자전거를 타시던 운동을 좋아하던 분이셨고
엄니 역시 초등학교 때 육상 선수를 할 만큼 운동체질인 사람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운동은 젬병이다.
운동이라 하면 그 어떤 것도 잘하지 못했으니 좋아했을 리 만무하고 언제나 흑역사 들만
가득했다.
그중에서도.
지금도 눈감으면 선명하게 떠오르는 한 장면이 있다.
내가 한국에서 그때는 국민학교라 부르던 초등학교를 다니던 때였다.
그날은 운동회로 엄마 아버지 할매 할배 할 것 없이 일가친척들이 모여
학교가 떠들썩한 동네 축제 분위기였다.
청군 백군으로 나뉘어 공 굴리기, 팥주머니 던지기, 줄다리기 등등
다채로운 종목들로 아이들도 부모님들도
즐거워했다.
그중 뭐니 뭐니 해도 운동회에 꽃은 달리기가 아니겠는가
학급마다 한 명씩 세워 두고 하는 반대항 달리기와 서너 명이 순서를 정해 두고 바통을 주고받으며
이어 달리는 계주는 그야말로 하이라이트 라고 하겠다.
드디어 그 시절 많고 많던 아이들을 우르르 줄 세워 두고 하는 반대항 달리기가 시작되었다.
흙먼지 펄펄 날리던 운동장에 하얀 분필로 길게 그어진 출발선 앞으로 아이들은 언제 라도
뛰어 나갈 듯 몸을 앞으로 내민 체 긴장한 듯 두 손을 불끈 쥐고 서있었다.
휙하는 선생님의 호루라기 소리와 펄럭 거리며 올라가던 깃발이 신호가 되어
아이들은 앞을 다투어 뛰어 나간다.
온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뛰는 것이니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새빨개진 얼굴로 최선을 다해 뛰었다.
그런데 점점 내 차례가 다가 오자 나는 무언가 싸한 느낌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고 했던가
그 시절 학급도 여럿이고 아이들이 많아 모두 한 바퀴 뛰려면 제법 시간이 걸렸다.
문제는 반마다 아이들 숫자가 조금씩 달랐다는 거다.
맛집 오픈런 하듯 길게 늘어선 줄에서 차례를 기다리던 나는 식겁하고 말았다
우리 반에서 키순서로 끝번이던 나와 다른 반 키 작은 1 번들과 나란히 서게 되었지 뭔가.
오 마이 갓뜨!
지금은 그렇게 크지 않은 내 키가 그 당시 초등학생으로는 아주 큰 키였다.(아마도 내 키는 초등학교 때 다 크고
더 이상 자라지 않았지 싶다.)
상상을 한번 해보시라,..
150센티가 넘는 멀대? 같은 아이와 각반에서 가장 올망졸망 한 아이들이 한 줄로 나란히 서 있다는 것만으로도 벌써 여기저기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어린 나이 에도 이거 잘해야 본전이고 못하면 개망신이다 싶었다.
요이 땅! 호루라기가 울리고 나는 최선을 다해서 뛰었다.
정말이지 겁나 뛰었다.
다만 내 몸뚱이가 마음 같지 않았을 뿐이다.
그 시절에 길던 다리로 아무리 휘저어도 앞서 지지가 않았다.
결국 내 어깨에나 간신히 올정도로 작은 아이들이 앞서 가는 걸 보며 뛸 수밖에 없었다.
급기야 전교에서 우리 학년에 가장 작다는 아이와 단둘이 남았다.
그 모양을 지켜보고 있던 관중석? 에서 자지러지게 웃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무슨 수를 써서 라도 저 조막만 한 아이를 제쳐야겠다는 심정으로 이를 악물고 뛰었다.
전교에서 제일 큰 아이 중에 한 명과 가장 작은 아이와의 달리기 시합이라니...
이미 체격 조건도 불공평한데 거기다 작은 아이는 다람쥐 같이 날랬다.
아무리 애써도 내 긴 다리는 그 짧은 다리를 이길 수 없었다.
결국 그 아이는 마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선수처럼
환하게 웃으며 내게 꼴등을 넘겨주었다.
그날...
나는 원치 않았으나...
개그콘서트 그 시절에는 웃으면 복이 와요 같은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누군가
의 몸개그를 보았을 때처럼 사람들은 환호하며 박장대소했다.
덕분에 많은 사람들을 웃게 해 주었지만 정작 나는 즐겁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일이 어디 그때뿐 이였겠는가 운동 못하는 몸뚱이를 지닌 나는
언제나 새로운 것을 시도할 때면 또 다른 레코드를 갱신하고는 했다.
특히나 사회 체육이 발달한 독일에서 살면서 몸치인 나는 눈에 뜨일 때가 많았다.
왜 아니겠는가?
독일이 어떤 곳인가 동네마다 시에서 관리하는 수영장과 체육관이 넘쳐 난다.
아이들은 아기 때부터 엄마 아빠와 베이비 수영반에서 물과 친해지며
걸음마 시작 하면 네발 자전거를 타기 위해 먼저 발로 타는 나무자전거를 타고 다닌다.
그러니 여기 아이들은 초등학생만 돼도 자전거는 선수처럼 잘 탄다
넘어지지 않으려 아등바등 자전거 페달로 발전기 돌리듯 하는
나와는 포스부터 달랐다.
그뿐인가
이 동네 대부분의 아이들은 유치원 때 이미 생존을 위한 수영 자격증 일명
Seepferdchen을 받기 위해 강습을 받는다.
그뿐인가 초등학교에 가면 체육시간에 정식으로 수영 수업을 하는 곳이
많다.
그러니 독일 사람들 중에는 수영을 못하는 사람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또 아이들의 방과 후 활동 중에는 운동을 빼놓을 수가 없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것이 축구, 배구, 핸드볼 같은
구기 종목이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체격도 좋은 사람들이 많은 독일에서
몸치인 나는 너는 어느 별에서 왔니? 하는 시선을 받을 때가 많았다.
남편과 함께 대학 테니스 클럽에서 수강했을 때도 그랬다.
안 그러래 길이 길고 잘 달리는 독일 여학생들과 테니스 공을 치고받다 보면 나는
늘 다른 곳에 가 있을 때가 대부분 이였다.
그래도 체격 좋은 이 동네 사람들 보다는 크지 않은 내가 아무래도 더 유연하지 않을까?
하고 시작해 본 요가와 기공 수업에서도 나는 언제나 남다른 모습으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렇게 이것도 저것도 운동은 포기 한 체 살다가 어느 날 조깅 동우회에 합류하게 되면서 그래도
상태 상관없이 그저 포기하지 않고 뛰기만 하면 되던 미니마라톤 만이 유일하게 내가 할 수
있는 운동이었다.
물론 그 남아도 코로나로 인해 전 세계가 뒤집어지던 팬데믹을 지나오며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그만둘 수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60이 낼모레인 남편과 50대 중반으로 너머 가던 나는 더 이상 운동을 미룰 수 없는 몸상태가 되어 가고 있었다
그래서 남편과 함께 독일의 헬스장에 등록을 해 버렸다.
이번에 무조건 오랜 간다! 지속 가능한 운동을 할 테다! 를 외치며 말이다.
To. 애정하는 독자님들
운동부족으로 나날이 지구는 둥글다를 몸소
실천하고 있는 독일의 김자까 인사드립니다.
얼마 전 비로소 운동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새로운 매거진
운동부족 탈출기를 시작합니다.
의지부족에 운알못인 제가 지속적인 운동을
하기 위하여...
하나하나 그 내용을 공유해 나갈 예정입니다.
저처럼 운동을 좋아하지 않는 분들에게는 위로와
선한 자극이 되고 또 운동 좋아하는 운동러 분들에게는
엔도르핀이 샘솟는 웃음을 드릴까 합니다.
이미 매거진 숫자가 차고 넘칩니다 만
그럼에도 새로운 시작은 늘 설렙니다.
작가! 지발 하나만 이라도 잘해 보렴! 하는 분들도
계시지 싶습니다만
어차피 글 쓰는 사람 맴 아니겠습니까 ㅎㅎ
배 째라 김자까 또 뵙겠습니다.
모두 건강하고 행복한 시간 되시기를요^^
독일에서 김중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