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핵추남 May 25. 2024

나는 F형 회사원입니다 (26)

헤어질 결심

곧 있으면 3개월의 병가가 끝난다.

지금이 병가 끝나기 한 달 전이니까 어떤 것이든

결론을 내야 된다는 압박에 며칠을 혼자 심란했다.


회사를 가지 않으면서 증상들이 많이 좋아졌지만,

회사랑 연결된 느낌은 계속 남아 있었다.

제주도 보름 살기를 다녀와서부터,

'이대로 회사를 가도 괜찮을까? 휴직을 연장할까?

이럴 거면 아예 퇴직이 나을까?'

꼬리에 꼬리를 문 고민이 시작되었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된다.'

오늘 아침에 눈 뜨자마자 문득 든 이 생각에,

친했던 몇몇 동료들에게 퇴사 예정 소식을 미리 알리고

그녀에게 전화했다.


"복귀가 한 달 남은 시점이라, 미리 퇴사 의향을 전하려고 합니다."

돌아오는 그녀의 대답은 놀랍도록 건조했다.

"네 알겠어요."

4년 반 동안 같이 일한 그녀의 대답이었다.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아. . . 내가 이런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그렇게까지 열심히 했구나'

허탈함, 서운함, 억울함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부정적인 감정들이 갑자기 썰물 같이 빠져나가고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그녀에게 연락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뛰고 답답한 가슴을 부여잡았던 내가,

오늘은 그녀에게 전화해서 나의 의견을 전하다니.

삶의 주도권을 되찾은 느낌이었다.


막상 부딪히고 나면 별거 아닌 것이란 걸 알지만

익숙해지지 않고 매번 마음먹기가 힘들다.


오늘은 심리상담도 정신과 진료도 오랜만에 후련한 마음으로 마치고 돌아오는 길.

지인들이 보낸 응원의 메시지들을 확인하면서

'회사'와 '헤어질 결심'을 좀 더 단단히 굳혀본다.


"그 사람(그녀)은 인간으로서 이미 고장 난 거야."

오늘의 이벤트를 들은 남편이 말에 또 한 번 마음이 놓인다.

(아직 나만의 홀로서기는 멀은 듯하다. ㅎㅎ)


어찌 됐든 마침내 '결심'하고 정면으로 부딪치고 극복해 낸 나,

엄청 칭찬해.

오늘 멋있었어.




최근 며칠간 마음에 요동이 치는 듯한 모습의 허양을

바라보던 남편.

그러나 이번에는 예전과 달리 걱정이 되지 않는다.

요동의 진폭이 예전과 달리 작아 보여서일까?

지난 세 달간 쉬며 회복해 가는 허양을 봐 왔기 때문일까?

잘 모르겠지만 알아서 잘할 거 같단 믿음이 생겼다.


제주도 혼자 살기를 다녀오고 개명도 하고

이렇게 저렇게 새로 태어나는 허양의 모습을 보니

기쁘고 기대되고 흥분된다.


‘나 직업란에 무직이라고 써도 괜찮아?’

라는 허양의 질문에,


‘나는 너무 괜찮고, 내가 괜찮은지는 중요치도 않고,

 무직이라니 너무 좋잖아. 그동안 그 회사와 그녀 및 그에게 묶여 아무것도 못했는데 이제는 새로운 것을 담을 공간을 마련할 수 있잖아. 그게 어떤 걸지 그리고 나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기대돼.’

라고 허양의 남편은 대답했다.


오랜만에 ‘그녀’가 허양의 일기에 등장했는데

‘그녀’에 대한 허양의 감정과 태도는 예전의 그것과 달리

매우 당당하고 단단하다고 느껴졌다.

그런 그녀를 칭찬하고 큰 결심을 기념하기 위해

오늘은 소고기를 먹어야겠다.

일기에서처럼 허양의 남편 눈에 허양의 상사 ‘그녀’는

허양보다 더 아픈 사람이다.

그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든 부정하고 싶어서이든 아픈 상태가 계속되어서일지 그녀는 인간의 다정함을 잃어버린 것 같아 보였다.

예전에는 허양과 같이 그녀를 원망하던 남편은

오늘, 그녀가 참 불쌍한 사람 같다고 생각했다.

이전 26화 나는 F형 회사원입니다 (25)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