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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핵추남 Jun 01. 2024

나는 F형 회사원입니다 (27)

곧 여름

곧 여름.

언제쯤 고요한 일상에 익숙해질까?


어제 산책길에 우연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봄이 온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녹음이 푸르르다.

"여름이 온 것 같다."

말을 내뱉고 주위를 둘러보니,

사람들의 옷차림도 벌써 여름이다.

일교차가 크긴 하지만 아침에는 잘 나가지 않으니,

더워진 날씨를 먼저 느낀다.


태생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죄책감이 드는 사람이라,

일거리를 만들기 위해 25년 동안 써왔던 핸드폰 번호를 바꿨다.

개명한 이름 정보를 여기저기 바꾸느라 분주했다가

갑자기 찾아온 평화가 또 불편해졌다.

그래서 이김에 사람도 정리하고, 스팸, 광고 문자도 받고 싶지 않아서  휴대폰 전화번호를 바꾸기로 결정했다.

긴 시간 나의 모든 역사를 같이 했던 휴대폰 번호는 허무하게도 웹사이트에서 단 5분 만에 바꿀 수 있었다.


그리고 찾아온 고요함.

하루에도 수십 번씩 울리던 핸드폰이 조용해졌다.

그러자 잠시 평화로웠던 내 마음에 조금씩 불안이 찾아왔다.


병가를 낸 지 2개월 차,

엉덩이에 있던 굳은살도 없어지고,

(매일 사무실에 앉아있어서 그런가 출근할 때는 굳은살이 없어지지 않았었다.)

몸무게가 늘었고,

그간 챙기지 못했던 개인 재정 상황/금융 상품 등을 정리하고,

개명을 하고, 전화번호를 바꾸고,

이곳저곳 여행을 다니고,,

이제야 좀 쉬는 것 같다 느껴서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온전한 평화를 찾지 못한 것 같다.


'앞으로 뭘 해야 할까?'

마음의 여유가 조금 생기고,

퇴직하겠다고 지르고 난 뒤 그 후련함이 지나가고부터

다시 나를 괴롭히는 질문이다.


현실에 집중하라는 상담 선생님 말이 무색해지지 않도록

오늘도 계속 되뇌어 본다.


'조급해하지 말자, 천천히 해도 괜찮아.'




너무 많은 것을 했기에 고요함을 찾고 싶었는데

정작 고요함이 찾아오니 무얼 해야 하지 않을까라고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허양을 보는 남편에게

‘분명 나아지는 것 같았는데 아닌가? 이 상황은 계속되어야 하나? 만성질환처럼 안고 살아가야 하는 건가? 지금보다 나빠지는 건 아니겠지? 나는 무얼 해야 하지?’

라는 생각이 잠시 스쳐갔다.


그렇지만 곧, 이 모든 것이 자연스러운 거란 생각이 다시 들고 마음이 편해졌다.

산을 오를 때도 오르막만 있는 것이 아니듯,

나아지다 말다가 반복될 거다.

그러나 허양은 어떻게든 좋아지겠단 의지가 있다.

그렇다면 느려도 우상향인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다만 그 과정에서 제일 힘들고 혼란스러울 사람은

바로 허양일 거라고 남편은 생각했다.

아프기 때문에 무얼 해도 남들보다 배가 넘는 에너지를 써야 하고 쉽게 지치기 때문이다.


마라톤의 피스메이커처럼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뛸 수 있도록 허양의 옆에서 도와주어야겠다고 남편은 생각했다.


허양이 더 이상 못 하겠다며 스스로의 목을 쥐던 그 날은 아직 많이 춥던 겨울이었는데 그러게, 곧 여름이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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