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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구의 엄마 Aug 09. 2023

게임 때문에 한글을 익힌 아이

스트레스 없이 한글 익히는 방법에 대해. 하루아침에 일어난 일은 아니다.

아이가 네 돌 전후로 꽤 많은 한글을 읽기 시작했다. Trigger가 된 것은 게임이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 우리 아이는 게임하면서 한글 읽기 시작했다고 알고 있다. 그러면서 아이의 타고난 유전자가 좋아서 그런 것 같다고 하시는데...


사실 아이와 몇 년을 함께 지낸 사람으로서 유전자보다는 엄청난 Input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이 정도로 책을 읽고, 이 정도로 대화를 나누고 자란 아이는 흔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내가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네 돌 전까지 엄청난 언어 경험을 지닌 아이가 게임이라는 신세계를 접하면서 글자를 익히는 것이 게임을 하는 데 있어 얼마나 큰 효용을 주는지 스스로 느끼고, 적극적으로 물어보기 시작했다. 게임에 나오는 이런저런 버튼, 짧은 지시사항에 적힌 글자들을 보면서 계속 질문을 했다. 이건 뭔지. 저건 뭔지. 그리고 아이가 자주 물어보는 것은 물어보기 전에 화면을 보고 있다가 아이가 궁금해할 만한 글자를 바로바로 소리 내서 알려주기도 하고.


이럴 때 나는 눈치 빠른 인공지능 비서 같은 상호작용을 해주곤 한다. (사실 이것에 자주 지친다. 쉽지 않다. 나도. 그래도 다섯 돌을 앞두고 있는 나는 힘을 뺄 때는 뺀다. 네 돌 즈음에도 나름 힘을 조금 빼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도 힘을 뺐다고 할 수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때는 이런 글을 쓸 마음의 여유도 없었으니까.) 여하튼 아이는 게임을 시작하면서 게임 속에 등장하는 짧은 단어나 문장이 단어 카드, 문장 카드 역할을 하면서 짧은 시간에 글자를 습득했다.


우리 아이가 언어를 배운 과정은 '어른 중에 좋아하는 컨텐츠 덕분에 특정 언어에 대한 관심이 생기고, 그 관심이 다양한 언어 학습으로 연결되면서 특정 언어를 꽤 유창하게 하는 사람'과 비슷한 과정으로 언어를 배웠다.


말을 시작할 때는 책에 있는 문장, 책을 읽으면서 해줬던 엄마의 주절주절 곁다리 이야기, 주변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기반으로 엄마와 나눈 대화가 아이 언어 세계를 풍부하게 만들어줬고. 아이가 글자를 읽기 시작한 것은 아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게임이라는 것을 잘하고 싶어서였으니까.


사실 엄마와의 놀이를 너무 좋아하고, 뛰어노는 것을 좋아했던 아이라 미디어에 대한 관심 자체가 늦게 생겼던 아이지만, 한 번 생긴 미디어에 대한 관심, 게임에 대한 관심이 순식간에 증폭되면서 이것을 어떻게 컨트롤해야 할지는 여전히 나의 숙제이긴 하지만... 자연스러운 흐름 속에서 삶에 꼭 필요한 글자 읽기를 서로 스트레스받지 않고 즐겁게 해낸 것에 대해서는 매우 만족한다.




"게임하면서 한글 익혔어요."라는 말과 함께 내가 혼자 중얼거리는 말이 있다. "지금까지 책을 얼마나 많이 읽었는데요. 지금쯤이면 한글을 읽을 수밖에 없을 거예요."라고 말.


대부분 "책 읽어준다고 글씨를 읽나?" "책 많이 읽어준다고 한글 읽지는 않던데?"라고 말한다.


사실 내가 정말 열심히 책을 읽어줬고, 아이도 함께 열심히 읽었기 때문에 우리의 노력을 가벼이 여기는 것 같아 좀 그럴 때도 있다. 그래서 책을 많이 읽어주면 아이가 언제 어떻게 글자를 인지하고, 익히게 되는지 적어보고자 한다.


아이랑 스트레스 없이 글자라는 것을 익히고 싶으면 정말 엄청난 양의 책을 읽으면 된다는 것을 나와 아이가 실천에 옮겼고, 실제로 그 일을 경험했으니까.  


결국은 Input, 노출의 문제이다. 대부분의 인간의 학습과 관련된 문제는. 같은 것을 더 많이 반복하고, 더 많이 해본 사람이 결국 잘하는 것이다.




1.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좋아하는 책 중에 쉬운 글자로 이루어진 책 표지부터 글자를 인지하기 시작한다.


아이들은 끊임없이 표지 & 책 기둥에 적힌 책 제목과 자신이 좋아하는 책 제목을 매칭하면서 표지에 적힌 글자들을 인지하기 시작한다.


책을 몇 번만 반복해서 보다 보면 이미 내용을 다 아는 상태로 계속 보게 된다. 돌 전후의 아기가 보는 책 중에는 단순한 책도 많기 때문에. 그런데도 아이는 한 번 꽂히면 백 번도 넘게 같은 책을 본다. 자신이 원하는 책을 고르기 위해서 아이는 열심히 책 표지, 책 기둥을 외운다. 아이들이 책을 골라오는 것이 의미 없는 활동이 아니다. 그래서 아이들 책은 책 기둥도 눈에 잘 띄기 위해 노력한 흔적들이 보인다. 아이 책에 진심인 엄마는 책 표지를 작게 출력해 책 기둥에 붙여주기도 한다.


나는 이 정도 노력까지 하는 엄마는 아니었고, 이렇게 해 놓은 중고 책을 사본 적은 있다. 실제로 아이가 어릴 때 책기둥에 붙어있는 책 표지의 작은 달님 그림을 보고, 달님 책이라면서 골라온 적이 있다. 책기둥 작업이라 불리는 이러한 엄가다 (엄마의 노가다)가 헛된 노력이 아님을 몸소 체험한 적이 있다.


2. 같은 책을 반복해서 읽다 보면 책 속에 있는 글자에도 관심을 보인다. 


적당히 아이에게 책을 읽어줘 본 경험이 있다면 아이가 특정한 책을 자꾸 읽어달라고 해서 고민 아닌 고민을 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근데 나는 이것에 대해 사실 딱히 고민을 해본 적은 없다. 또 읽어달라고 하면 그냥 또 읽었다. 지겹다는 생각보다는 이번에는 이 책에서 또 어떤 새로운 면을 발견해서 이야기를 좀 더 다른 방향으로 풀어가 볼까 하는 마음으로 읽어줬다. 혹은 지난번에 이미 발견해 놓은 재미있는 장면을 기억해 뒀다가 하나씩 이야기로 풀어나가거나. 그래서 나도 지루하지가 않았다. 내가 아이에게 줄 수 있었던 큰 선물이 아니었나 싶다. 이런 마음으로 책을 읽어줬다는 것은.


이런 과정에서 아이는 책 내용을 거의 다 외우게 된다. 그러면 책을 읽는 동안 엄마도 아이도 여유가 생긴다. 평소에 관심 두지 않았던 것들에 관심을 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처음에는 대부분 그림책에 있는 그림과 관련된 것이지만, 가끔 아이가 글자를 가리키면서 "이건 뭐야?"라는 눈빛을 보낼 때가 있다. 왜 여기 이런 게 있지 싶었나 보다. 그때 그 글씨를 그대로 읽어준다. 평소에는 한 페이지를 펴놓고 그림 구석구석 살펴보면서 이야기를 지어내고, 놀이하느라 바쁘지만, 간혹 이렇게 진지하게 책을 책으로 대하는 때가 있다.


아이들 책은 의성어, 의태어만 적혀 있는 경우도 있고, 문장도 짧기 때문에 아이가 시각적으로 본 글자와 소리를 매칭하는 데 아주 큰 노력이 필요한 편은 아니다. 그렇게 더듬더듬 한 글자씩 익혀나갔던 것 같다.


책을 읽어줄 때 아이는 언제나 진심이었다. 나와 함께 책 구석구석을 눈으로 찬찬히 살펴보고, 엄마의 목소리를 듣고, 엄마와 아이가 함께 한 관련된 경험을 떠올리면서 읽었으니까.


우리 아이만 그런 것이 아니라, 아이들은 대부분 자신이 좋아하는 주제에 대한 책을 진심으로 읽어주면 진심으로 대한다. 그 과정에서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엄청난 양의 글자에 노출된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3. 아이가 책에 적힌 의성어, 의태어, 캐릭터 근처에 적힌 짧은 대사에 관심을 보일 때 잘 반응해주면 글자 습득에 큰 도움이 된다.


아이가 글씨를 조금씩 인지하기 시작하는 것 같다고 느껴졌을 때 아이가 책을 읽다가 "하하하"라고 강조되어 쓰여있는 웃음소리를 가리키면서 "엄마! 하하하! 하하하 웃었대!"라고 하기도 하고. 이런 류의 쉬운 글자를 가끔 스스로 읽고 되묻기도 했다. 당연하지만, 이렇게 쉬운 글씨, 자주 등장하는 글씨부터 인지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아이들 책 중에는 본문 내용 말고도 그림 속에 짧은 대사가 적혀있는 경우가 꽤 있다. 여기저기 그림 속에 양념처럼 있는 글씨들. 강조하고 싶은 대사를 크게 강조해서 그림과 함께 적거나 여기저기 작게 대사가 적혀있는 경우, 문장의 길이도 짧고, 강렬하거나 재미있는 말인 경우가 많아서 아이는 그러한 것들에 관심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이건 뭐라고 쓰여있는지 읽어달라고 하기도 하고, 어느 정도 암기를 할 정도록 반복해서 읽고 난 뒤에는 뭔가 빼먹고 읽고 넘어가면 빠뜨린 내용을 지적하는 경우도 있다.


읽어주는 사람 입장에서는 이렇게 책을 보면 한 권 읽는데 시간이 꽤나 걸려서 이거 언제 다 읽나 싶을 수도 있지만 한글을 자연스럽게 익히게 하려면 읽어주는 사람의 인내심이 필요하다.


읽어주는 입장에서는 조금은 귀찮을 수 있어도 이런 것 하나하나 아이가 손가락으로 가리킬 때 잘 반응해 주면 좋다. 언젠가 누가 내가 추천해 준 책을 보더니, 그림 속에 짧은 대사가 많이 섞여 있으니까 "하아... 애가 이 책 좋아할 것 같긴 한데 이거 다 읽어주려면 힘들겠다. 우리 애는 이거 다 읽을 때까지 안 넘어가는데... 한 권 읽어주려면 한참 걸리겠네." 라면서 읽어주기 까다로운 책이라고 한 적이 있었다. 그 마음도 이해는 했다. 자야 하는데, 계속 책 보자고 해서 수면 시간이 늦어지는 것도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잘 아니까. 하지만 동시에 마음속으로 '아이가 스트레스 없이 한글을 익히려고 치열하게 노력하고 있는데, 조금만 참아봐.‘ 라는 생각도 들었다. 평소에 책을 열심히 보여주려고 노력하는 지인이라 말만 저렇게 하지, 실제로는 얼마나 열심히 읽어줬을지 잘 안다.

 

4. 아이가 글자에 관심을 보이는 느낌이 들면 글자에 대해 은근히 알려주는 책들을 조금씩 같이 보면 좋다.


생각하는 ㄱㄴㄷ과 비슷한 책들도 중간중간 꽤 읽었다. 아이가 가장 좋아했던 글자 책은 생각하는 ㄱㄴㄷ이었기 때문에 이 책을 대표로 언급했다. 이 세상에 글자라는 것이 존재하고, 그 덕분에 이렇게 책을 읽을 수 있고, 우리가 재미있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는 것을 아이에게 알려주려고 했다.


아이에게 글자의 효용은 게임을 하면서 폭발했지만 말이다.


이제 생각하는 ㄱㄴㄷ은 거의 보지 않고, 최근에 아이와 잘 보고 있는 책은 '받침 구조대'이다. 이 책이 처음 출간될 즈음 산 책인데, 내용이 재미있어서 꾸준히 잘 보고 있다.


5. 아이가 기억하고 있는 내용과 책에 적힌 문장을 매칭하면서 혼자 책을 읽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일부러 방해하지 않는다.


이렇게 열심히 책을 읽어주다 보면 아이가 어떨 때는 혼자 책을 읽기도 한다. 아기 때도 잠깐 혼자 놀 때 혼자 책을 넘기면서 보기도 했었다. 그때는 그림 위주로 봤다면 이제는 그림과 글을 모두 보는 것이 느껴진다. 글을 꽤 자유자재로 읽는 편이다.


이미 내용을 숙지하고 있는 상태에서 지문을 읽으면 훨씬 수월하게 읽을 수 있었던 것과 비슷한 맥락이 아닐까 싶다. 마치 잘 안 읽히는 영어 지문을 여러 번 반복해서 읽으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알고 있는 상태에서 영어 지문을 읽으면 술술 읽히는 것처럼.




아이는 거의 모든 글씨를 읽고 충분히 혼자 책을 볼 수 있는 것 같지만, 여전히 혼자 책을 읽지는 않는다. 내가 읽어주는 것을 좋아한다. 꽤 긴 기간 그럴 것이라 생각한다. 건강하게 유대감을 형성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 때문에 아이가 원할 때까지는 읽어주려고 생각하고 있다.  


체계적으로 글씨 읽는 법을 가르친 것은 아니고, 인공지능을 학습시키듯 엄청난 인풋을 쏟아붓는 전략을 통해 얻게 된 읽기 능력이라 맥락을 파악할 수 없는 상황에서 특이한 고유명사를 읽을 때는 오류를 범하기도 하니까.


아이 네 돌 즈음까지는 조금은 특별한 엄마였던 것 같기도 하다. 진짜 아이와 함께 보내는 시간을 잘 보내려고 엄청나게 노력했다. 밤에 조금 늦게 자더라도 아이가 책을 계속 보겠다고 하면 꽤 많이 받아줬고.


다섯 돌을 앞둔 나는 밤에 자려고 하면 책을 가져와서 오늘은 안 된다고 하는 날도 있고, 제발 날 밝을 때 TV 보고, 게임하면서 어영부영 시간 보내지 말고, 그때 중간중간 책을 읽자고 화를 내는 날도 있는 평범한 엄마다. 아들과 게임은 떼려야 뗼 수 없다는 것도 알았고, 아들 덕분에 나이 40을 앞두고 게임 실력이 늘고 있는 그런 평범한 엄마. 다시 평범하지 않아 지는 것인가? 게임 잘하는 엄마가 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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