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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 여름의 빌라, 백수린

아름다운 단어로 풀어낸 아름답지만은 않은 우리의 인생들

by 김주렁

총 8개의 소설이 수록된 소설집이며, 잔향이 많이 남는 느낌의 이야기들이었다. 회고하는 입장에서 서술한 글이 많았기도 하지만, 문장 자체가 애틋함을 더했던 것 같다. 아래 같은 문장은 전하려는 메시지도 애틋하나, 문장과 어휘 자체가 그 분위기를 배가시켜주었던 것 같다.


사람은 어째서 이토록 미욱해서 타인과 나 사이에 무언가가 존재하기를 번번이 기대하고 또 기대하는 걸까요.
(백수린, 여름의 빌라)


일상적인 소재와 평이한 상황을 가지고 흡인력 있는 글을 쓰는 것이 개인적으로는 어려운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소재가 일상적이지 않고 참신하거나 큰 반전이 있는 등 독자의 이목을 끌 수단이 있다면 문장의 완성도나 글의 얼개가 조금은 미흡하더라도 그 나름의 매력을 표출할 수 있다. 그러나, 누구나 겪을 수 있고 당장 옆집에서도 벌어질 수 있는 일을 소재로 독자를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문장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맨날 똑같은 말만 쓰고 일어나는 일도 뻔한 옆집 초등학생 아이의 일기장이 재미있기 쉽지 않을 것이니 말이다. 그런 면에서 작가는 일상적인 내용을 풀어나가는데 능했다. 담담하면서도 이따금 필요한 순간에는 경종을 울릴 수 있는 그 템포도 좋았고, 단어나 소재 선정도 생각할 거리가 많아서 읽으면서 즐거웠던 책이었다.


의도적인지는 모르겠으나, 대뜸 맥락과 벗어난 행동들이 등장하는데 그 의미가 궁금해지게 한다. 갑자기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는 것을 무서워하게 된다던가, 각설탕 탑을 쌓는다던가 말이다. 맥락과 상황 상 어떤 사건 혹은 상황이 들어가야 하는 자리는 맞지만, 왜 저 상황과 매개체가 선택되었을까 생각해보면 직유는 아니어서 고민이 된다. 이런 생각해볼 수 있는 소재가 있는 글도 좋다. 다만, 너무 주제에서 벗어나거나 의도적으로 작품의 복잡성을 늘리기 위한 이야기를 넣는 것은 오히려 작품성을 떨어뜨린다. 작가는 이런 측면에서 줄타기를 잘하는 것 같다.


아래는 각 소설들에 대한 감상문이다.



시간의 궤적


궤적은 수레바퀴가 지나간 자국이라고 한다. 이 글의 제목이 왜 시간의 궤적 일지 생각해보았다. 궤적은 결국 바퀴가 지나간 흔적이며, 바퀴의 이동에 의해 수동적으로 남겨진 부산물이다. 궤적을 봐서는 그 바퀴가 어떤 짐을 싣고 있었는지, 어떤 목적으로 향하던 길인지 알 수 없다. 이 이야기도 결국에는 한 사람의 시간의 궤적이었다. 남겨진 흔적일 뿐이며, 그 본질에는 다가갈 수 없었다. 그런 피상적인 회고록이었다.

파리로 유학을 떠난 삼십 대 중반의 여성이 화자로 등장하여 본인의 과거를 되짚어나간다. 그런 과정에서 주재원으로 파견을 온 비슷한 연배의 여성(언니)과 만나 친해지며, 프랑스인 남성을 만나 사귀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정착하기에 이른다.
이야기를 읽다 보면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중요한 정보가 등장하여 놀라게 된다. 특히 남편 브리스의 이야기가 예상보다 한 두 템포 빠르게 등장한다. 데이트 신청을 하고 만나는 이야기가 나오다가, 담담한 어조로 같이 살게 되었다는 내용이 나오고, 결혼했다는 소식이 갑자기 언니와의 일화를 설명하면서 등장한다. 전체 이야기 흐름이 있다면 초장에서 두괄식으로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풀어내고 이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는 뒤에서 풀어놓는다. 아래 같은 식이다.


내가 살던 집을 정리하고 그의 집에서 같이 살게 된 것은 석사 이 년 차 과정에 진학한 그해 10월이었다.
...
돌이켜보면 브리스와 내가 결혼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언니였던 것 같다.
(백수린, 시간의 궤적)


전체 인생에 있어 굉장히 중요한 시점들이지만, 막상 언니와 일상적인 대화를 하고 술 한잔 하는 묘사보다도 훨씬 짧고 담담하다. 화자가 이 사건들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서 이렇게 담담하게 사후보고 식으로 서술을 한 것일까? 아니면 내 의도는 아니었지만 내 인생이 이렇게 되었다는 식의 표현일까? 개인적인 해석으로는 '그냥 그렇게 됐어'의 후자 느낌인 것 같기도 하다.

화자가 1인칭으로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과 상황에 대한 사실은 알 수 없다. 한 사람의 궤적에서 다른 사람의 속내까지는 알 수 없었다. 주재원 언니의 소문에 대한 실체, 왠지 모를 언니와 브리스의 관계 등 명확하게 알 수 없도록 해놓은 부분들이 있다. 글의 제목과 잘 어울리는 방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살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그런 느낌의 글이었다. 이야기의 정서에 비해 그렇게까지 절망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회사생활을 하다가 꿈을 좇아 프랑스로 와서 석사를 취득하고, 잘 맞지 않는 것 같아 포기했지만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가정을 꾸린 삶. 표면적으로 보기엔 비극적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다. 하지만 화자의 태도는 실제 상황보다는 비관적이다. 프랑스에 공부하러 온 것 까지는 본인의 선택이었다고 하더라도, 그 이후의 일들은 마치 본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궤적이 그려졌고, 그렇게 되어버렸다는 생각이 화자의 기저에 깔려있는 것 같기도 하다.

본인의 삶의 궤적을 되돌아보며 끊임없이 본인의 삶에 대해 반문하고 고민하는 것이 이야기의 주된 맥락이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사는 이 인생이 옳은 길인지, 옳다고 하더라도 나의 자리가 맞는 것인지에 대한 꾸준한 고민이 이어진다. 타국에 살고 있다는 물리적인 현실 자체도 위의 고민에 더해진다. 타국에서 타국 사람과 결혼하여 살아가는 인생이 나의 자리가 맞는지에 대한 고민이,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살면 안정될 거라는 그 인생이 내가 살아갈 자리가 맞을지에 대한 심리적 고민과 이어지는 것 같다.

이미 그려진 궤적을 보며 끊임없이 고민하고, 이는 앞으로 그려지게 될 내 삶의 궤적은 옳을지에 대한 고민으로 확장된다.



여름의 빌라


캄보디아 여행 중 독일인에게 비판을 건네는 독일 정치사 전공인 한국인 지호의 말이 굉장히 복합적이다. 굳이 속내를 파악하려 하지 않더라도 상황 자체가 너무 복합적이다.

여름의 빌라에서 오는 느낌은 휴양지와 휴가, 그리고 이때의 추억이다.

여러 상황과 감정들이 혼재되어 있다. 독일에서 만나 일본어로 대화를 나누는 불교에 심취한 교수와 일문학을 전공한 한국인.

화자의 남편 지호는 원죄를 느끼고 있었고, 원론적인 입장이며, 이미 벌어진 역사에 대한 해석을 바탕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작품에서 당신으로 지칭되는, 베레나는 포용과 이해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둘의 주장 자체는 그리 복잡하지 않지만, 본인들의 입장에서 오는 이해관계가 복잡하다. 독일 정치사를 공부한 한국인과 불교에 관심이 많은 독일인 교수 사이의 캄보디아인에 대한 논쟁. 사실 이 둘의 논쟁을 가장 당혹스러워할 것은 캄보디아인들이다. 지호는 그들에게 연민을 느끼지만, 연민을 느끼며 그들의 삶이 힘들 것이라고 단정 짓는 행위 자체도 그들에게 있어서는 폭력이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과거인가, 현재인가에 대한 가치관 차이도 있는 것 같다. 과거에 일어난 일, 이미 벌어진 일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전범국이자 상대적 강대국 사람들은 평생을 후회하며 살면서 본인보다 못 사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길 것이며, 캄보디아로 대표된 상대적 후진국들은 평생 상대적 박탈감에 괴로워할 것이다. 현재에 집중하면 캄보디아 인들도 주어진 상황에서 생존의 방식을 찾아낼 것이며, 다른 나라의 사람들도 그들과 다른 생존 방식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분법적인 질문이 대체로 그렇듯, 위의 질문에도 한쪽을 정답으로 볼 수는 없다. 결국 판단을 위해 필요한 것은 척도이나, 이 척도를 정량화하는 것은 불가할 것이다. 최소 n명 이상, 최소 x원 이상 피해를 입혔다면 죄책감을 가지고 지원해야 한다는 식의 잣대를 누가 정할 수 있겠는가? 이를 최대한 비슷하게 구현해낸 것이 법일 터이나, 법도 결국 진리의 근사치까지만 접근이 가능할 것이다.

결국 정답은 없다. 하지만 본인과 의견이 다른 상대방에 대한 무조건적 비판과 배척은 피해야 한다. 이것이 결국 작가가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가 아닐지 감히 생각해본다. 이를 위해 인물들의 특성을 복합적으로 구성했다고 생각한다. 베레나를 당신으로 지칭하는 것도, 외국인이라는 거리감을 은연중에 줄여주기 위한 호칭 선정이 아니었을까 한다. 마지막에 알츠하이머에 걸린 베레나는, 과거 본인 국가의 원죄에서 벗어난 상태가 아니었을까 한다.

이야기를 통틀어 가장 직관적인 이야기 구성은 베레나의 손녀인 레오니가 캄보디아 친구에게 본인이 그린 집의 벽을 열고 들여보내 주는 장면이 아닐까 한다. 레오니와 캄보디아 아이가 보여주는 것은 결국 현재이자 미래일 것이다.
과거나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은 사람대 사람으로서의 소통. 결국 필요한 것은 지호와 베레나 중 어느 한쪽이 옳은가에 대한 선택이 아니다.


그들에 대해 외부인의 입장에서 해석한다는 자체가 가장 무례한 것일 수 있다. 관찰과 논쟁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존재여야만 했다. 그런 면에서 가장 옳은 선택을 내린 것은 레오니였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불쌍한 것인지, 정당한 노동을 하고 있는 것인지 고민할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식사를 했어야 하지 않을까?

고양이가 간식을 얻어먹으려 피크닉 중인 우리 가족에게 놀러 왔다고 생각해보자. 고양이의 건강 문제, 야생성 저하, 길고양이의 지나친 번식력을 걱정하며 망설이는 아빠와, 길을 헤매며 먹이를 찾으며 힘들었을 생각에 애틋하게 고양이를 바라보며 없는 간식도 사주자고 고민하는 엄마가 말다툼을 하는 사이, 아이는 이미 자신이 먹던 간식을 고양이에게 건네고 머리를 쓰다듬고 있다.



고요한 사건


사는 동네나 집에 따라 친구를 골라서 사귀는 아이들. 그 옛날 어린 왕자에서는 어른들만 숫자로 세상을 바라본다 하였지만, 지금은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세상을 숫자로 바라보는 행태가 팽배하다.

가장 난처한 것은 중간에 끼는 것이다. 소금 고개 주민들과 아파트 민 사이에 낀 재개발을 기다리는 화자의 가족은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다. 재능도 그렇다. 적당한 재능은 미약한 독으로 작용하여 그 사람을 좀먹기도 한다. 적당히 공부를 잘하는 화자의 입장이 한 층 더 난해한 것은 이 때문이기도 하다.


사건은 고요하지 않다. 작품에서 사건을 고요하게 바라보는 것은 화자이다. 화자가 고요하게 보려고 하는 사건이라는 것이 맞겠다.


달동네로 이사를 오고, 무호의 소문을 알면서도 모른 체하고, 해지에게 고백하는 무호를 바라보고, 고양이 아저씨가 맞는 것을 바라보고, 고양이를 묻어주려다 내리는 눈을 바라보는 화자. 화자는 본인의 인생을 자조적으로 바라보았다. 적극적으로 사건에 개입하지 않는, 수동적인 관찰자 정도의 역할이었다.


해지와 무호 이름을 보면, 획수가 그리 많지 않다. 해지는 보통 혜지로 많이 쓰이고, 무호는 이름으로 많이 쓰이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런 이름을 짓게 된 것도 소금 고개 아이들의 풍족하지 못하고 결핍된 모습을 나타내고자 한 장치는 아니었을까 싶다.



폭설


이해하는 것과 받아들이는 것은 다르다. 그녀는 그녀의 엄마를 이해하기보다는 받아들인 것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침묵 속에서 어둠의 도로를 달릴 뿐이었어
(백수린, 폭설)


위 대사가 서로의 관계와 입장을 짐작케 한다.

"짐승을 한 마리도 치지 않고 빠져나올 수 있었으니 우린 참 운이 좋구나."
(백수린, 폭설)


모녀의 로드트립에서 폭설을 헤치고 빠져나온 후 화자의 엄마는 위와 같이 말한다. 이대사는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결국엔 살아남았다는, 본인들 인생에 대한 자조 섞인 결과론적 회고가 아니었을까? 될 대로 되라 식의 인생이었더라도 결국 살아남았고, 폭설 속에서도 구조대가 나타났다.


로드트립이 인생의 우여곡절을 직선적으로 비유하여 잘 보여준 것 같기도 하다. 갑자기 잠들었다가 정신을 차리니 눈밭에 있는 둘, 괜찮을 거라며 낙관하는 엄마, 그러나 결국 멈춰버린 차. 결국 해결된 갈등도 없이 구조대에 의해 구조되어버린 삶, 갑자기 눈이 싹 사라진 도로.


그녀에게 갑자기 공포로 다가오는 계단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계단은 상승 혹은 하강, 경사로와는 달리 단계적으로 올라가게 되는 이미지가 있다.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거나 누군가를 밀어버릴 것 같은 충동. 단순히 불안감에 의한 생각으로 보는 것이 맞을까? 굳이 계단이었어야 할 의미는 무엇일까? 계단은 연속적이지 않다. 평지를 유지하던 땅은 일순간 90도 아래로 향한다. 엄마와 미국에서 함께하는 여름을 기다리던 그녀의 삶은 계단 같았을까?



아직 집에는 가지 않을래요


그녀가 갈망하는 것이 물질화된 것이 그 집과 젊은 남자들이었다고 생각한다. 작품에서 그녀가 지속적으로 관심을 보이는 것은 집, 무용 수석의 그 남자, 집 철거 현장의 건장한 남자 셋이다. 결국 그 집은 철거되었고, 무용 공연엔 가지 못했고, 철거 현장의 남자와는 일순간 마주친 것이 전부였다.

작품의 마지막에서, 집을 철거하고 새로운 집을 짓는다는 소식에 그녀는 고통과 기쁨을 동시에 느끼며 "이젠 상관없어."라고 말한다. 고통은 선망했던 대상의 상실에 의한 것일 텐데, 기쁨은 무엇이었을까? 일상의 무너짐에 슬퍼하기보다는 더 이상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겠다는 자조 섞인 기쁨이었을까?

반복되는 일상, 육아, 퇴직. 작품 제목의 집은 이런 일상이었을 것이다. 이런 집에 가지 않겠다는 것은 반복되는 일상에 대한 회의, 일탈 욕구의 표출이었을 것이다. 일상의 환기가 되지 않아서 스트레스를 표출하는 모습도 종종 나타난다. 무용을 배우셨냐고 물어보는 남자에게 날을 세운 반응을 보인 것까지는 문맥상 그러려니 했지만, 휴지를 풀어놓거나 쓰레기통을 넘어뜨리는 아이들을 변기에 집어넣고 레버를 내려버리고 싶다고 말하는 부분에선 확실히 한계까지 몰렸다는 느낌을 받았다.

기본적으로 집은 안정감과 편안함을 주어야 하는 곳이지만, 그녀에게 집은 점점 부담스러움과 굴레로 다가온다. 큰 사건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일상의 사소한 갈등과 불만이 모여서 삶이 어떻게 틀어질 수 있는지 섬세하게 보여준 것 같다.



흑설탕 캔디


할머니가 손녀에게 해준 이야기인, 흑요석을 손에 쥐고 호랑이에게 잡아먹혔다가 살아남은 소녀 이야기와 마지막에 손에 무언가를 꼭 쥐고 있는 할머니의 이야기가 연결된다. 할머니가 손에 쥔 것은 각설탕이었을 것이다.

일기를 통해 할머니의 생애를 따라가 보는 것이 이야기의 주된 전개이다. 하고 싶은 대로 산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이어진다. 대학에 입학했지만 선을 보라는 부모님의 말에 중퇴하게 된 이야기.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자유롭게 살고자 했으나 딸의 죽음으로 손자 손녀를 보게 된 이야기. 본인의 집에 살고자 집을 팔지 않고 잠시 손자 손녀들만 봐주려 했지만 결국 그 집으로 들어와 살게 되고, 프랑스까지 따라가게 된 이야기. 프랑스에 가서 말도 안 통하는 상황에서 찾은 사랑을 다시 떠나보내야 했던 이야기. 시작은 본인의 의지에 의한 것이었지만, 결과는 항상 어디에 귀속되어 수동적으로 결정되었다. 비슷한 내용의 반복이라기보다는 비슷한 형식과 상황이 반복된 것이 형식적으로는 흥미롭다.


각설탕을 쌓는 행위는 무엇을 보여주고자 한 것일까? 행위 자체는 단순했다. 브뤼니에씨가 각설탕으로 탑을 쌓았고, 그 행위를 이해하지 못하던 할머니도 어느새 같이 탑을 쌓고, 이내 무너지는 탑을 보며 즐거워하며 웃는다. 표면적으로 생각해보면 단순히 의미 없는 행위임을 보여주기 위한 수단이었고, 마침 각설탕이 티타임에 어울리는 소재였을 수도 있겠다. 여기에서 내가 궁금한 것은 추가적인 작가의 의도가 있을지이다.


각설탕이어야 했던, 탑을 쌓아야 했던 이유가 있을까? 각설탕을 쌓는 것의 결말은 정해져 있다. 무너져 내리는 것이다. 그러면 각설탕을 인생으로 생각한 것일까? 차곡차곡 남에 의해 쌓여나가던 인생의 마지막에 와서야 본인의 의지로 인생을 쌓아 올리는 할머니로 생각한다면 너무 억측일까? 할머니는 늙는 것 그 자체보다는 육체가 열정을 따라갈 수 없음을 슬퍼했다. 그런 상황과 함께 생각해보면, 무너질지언정 본인의 의지로 쌓아 올린 각설탕 탑에 할머니가 관심을 보였다고도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아주 잠깐 동안에


마음이 따뜻해지는 이야기였다. 너무나 착하고 인정이 많았기 때문에, 99를 잘하고 1을 못했더라도 1에 대해서 아쉬워한다. 작품의 화자는 착하고 반듯한 사람이다. 그렇기에 일순간의 망설임이 그에게는 그만큼 크게 다가왔을 것이다. 심지어 선행을 하면서 일순간 마음속으로만 망설였던 그 순간 때문에 말이다.
자로 직선을 그으면 조금만 틀어지거나 점이 튀더라도 신경 쓰일 것이지만, 손으로 적당히 그은 직선은 어느 정도 삐뚤어지거나 엇나가도 별다른 느낌이 없을 것이다. 착한 사람이 더 괴로워야 하는 것이 머릿속으로는 어색하나, 또 선행과 악행의 낙차를 생각하면 화자의 심정도 이해가 간다.



아카시아 숲, 첫 입맞춤


선주와 다미. 정 반대의 성향과 행동을 보여주는 화자의 두 친구는 양면성을 지닌 화자 페르소나의 화신들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성과 사회통념상의 선주, 충동과 본능에 더 가까운 다미. 어느 한쪽이 나쁜 것은 아니다. 다르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겠다. 어찌 되었건 이 소설은 화자의 청소년기에 있었던 고민과 갈등들을 섬세하게 보여준다. 마음을 간질이는 듯한 이런 소설은 단어 그대로 청춘이라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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