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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 테라피스트, B.A. 패리스

섣부른 단정과 손쉬운 선택지에 현혹된 독자의 시선을 잘 이용한 심리극

by 김주렁

추리, 심리극의 핵심은 얼마나 매끄럽게 핵심을 숨기고 독자의 시선을 원하는 곳으로 이끌 수 있느냐에 있다. 그런 점에서 B.A. 패리스의 테라피스트라는 작품은 제한된 시점을 바탕으로 독자를 본인이 원하는 방향으로 잘 유도해냈다.


책 소개 (출처 : 예스 24)

『테라피스트』는 보안이 철저한 만큼 폐쇄적이며, 이웃과 끈끈한 만큼 서로를 감시하는 눈길을 거두지 않는 런던의 고급 주택 단지라는 특수한 배경에서 이야기가 펼쳐진다. 고통스러운 트라우마로 불안정한 심리 상태에 놓인 주인공 앨리스가 겪는 의문의 사건들은 현재와 과거의 시점이 교차하면서 예측하기 힘든 방향으로 천천히 달려간다. 의심과 불안이 극한에 달하는 순간 마주하는 반전은 그간 쌓아온 복선의 설계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통쾌함과 시원함을, 오래 기다렸다 받는 선물처럼 기분 좋게 선사한다.


표지부터 심리 스릴러를 표방하는 이런 류의 책들은 독자의 의심 어린 시선을 기본 전제로 둘 수밖에 없다. 어떻게 보면 부담스럽고 불편한 상황에서 작가는 이야기를 풀어나가게 된다. 트릭이 단순할수록 독자 입장에서는 이해하기가 쉽겠지만 그 임팩트가 약할 것이며, 지나치게 복잡한 전개와 복선 또한 대다수의 독자를 만족시키기는 쉽지 않다. 또한, 복잡함을 늘리기 위한 개연성이 약한 복잡성은 되레 독자를 이탈시킨다.


기본적으로는 주인공인 앨리스의 1인칭으로 소설이 전개되다 보니 작가의 의도대로 시선을 유도하기에는 용이했다. 숨기고 싶은 내용은 앨리스의 시야 밖에 배치하면 되기 때문이다. 또한 작품 전반적으로 앨리스의 불안한 심리와 강박이 드러나는데, 이는 앨리스의 신뢰도를 떨어뜨리며 안 그래도 좁은 시야를 더 좁고 믿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레오와 싸우는 중에 토머스에게 연정을 느끼는 앨리스의 모습은 그녀의 입지를 더 좁게 만들어주었다. 종국에는 이런 편협하고 불안한 시야에서 벗어난 일들이 반전의 키가 되었으니 의도한 대로 잘 흘러갔다고 볼 수 있겠다.


대전제의 붕괴는 효과적인 반전 요소이다. 외부와 어느 정도 단절된 '서클'이라는 장소는 물리적인 시야를 좁게 만들면서도 심리적으로도 독자의 시야를 축소시켰다. 작품의 8할은 토머스 그레인저라는 사립탐정과 앨리스의 진실을 향한 여정이었지만, 사실 토머스는 사립탐정이 아니었고 본명은 존이었다. 이야기의 첫 시작점이 붕괴하고 나서 남는 것은 남은 이야기들의 순차적 붕괴이다. 카드로 쌓아 올린 탑의 첫 번째 카드를 뺐을 때 무너지는 카드 성. 심리 스릴러의 가장 큰 매력은 이 붕괴에서 오는 혼란과 이에 수반되는 카타르시스이다.


작품 내에서 절대적으로 믿을만한 사람은 토머스뿐이었던 점이 이와 같은 구성에 큰 역할을 했다. 앨리스는 작품의 화자이기는 하나 불안정한 강박을 지속적으로 표출하여 사실상 그 변별력이 약했고, 앨리스의 남편인 레오 또한 집과 본인의 과거를 숨겼던 것을 들키고 나서도 거짓말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신뢰를 잃었다. 폐쇄된 커뮤니티인 '서클'의 이웃들도 앨리스에게는 무언가를 숨기거나 수상한, 의심받고 있던 입장이었다. 이런 불신 속에서 앨리스는 더더욱 죄책감과 사명감에 사로잡혀 토머스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었으며, 독자들도 자연스레 이 시점에 이입할 수 있었다.


정보는 다다익선이 아니다. 작품의 주된 전개 방식은 앨리스가 점차 새로운 정보를 얻게 되면서 시작된다. 이전 시대를 대상으로 한 소설들은 정보의 결핍과 일방적인 제시를 통해 이야기를 풀어나갔다면, 이 소설은 주인공에게 수많은 정보와 대화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화자의 눈을 가렸다. 앨리스가 니나의 살인사건에 대해 알게 되는 인터넷과 신문 기사들, 니나와 데비, 레오 등 인적자원을 통한 정보, 서클 내 이웃들의 대화를 통한 정보, 사립탐정 토머스를 통해 전달되는 정보 등 앨리스에게는 다량의 정보가 제공된다. 하지만 불확실하고 불분명한 다수의 정보는 되레 옳은 선택을 방해한다. 앨리스가 토머스의 정보를 인터넷에서 찾아보고 맹신한 것도 이런 그릇된 정보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정보의 홍수 시대에 맞는 전개 방식이었던 것 같다.


기본적으로는 인간군상극의 형태이지만, 인물들이 다양한 것 치고는 그들 사이의 얼개가 그렇게 치밀했는지, 필연적으로 필요한 인물들이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고향 친구인 니나와 데비는 서클 밖의 조력자 포지션이지만, 이야기 전개 상 꼭 두 사람이 필요했을지 싶다. 한 사람만 등장했어도 두 인물의 역할을 어느 정도 커버할 수 있지 않았을지 싶다. 서클 내부의 이웃들도 그들이 취하는 스탠스가 다르고 앨리스가 의심할 수 있는 범위를 넓혀준 것은 맞지만, 다양한 선택지 정도의 역할만 해준 것은 아닐지 싶은 생각이다. 이런 심리 추리극에서는 인물이 다양한 것이 복잡성을 늘려줄 수는 있겠지만, 그 인물의 수가 다다익선 일지는 개인적으로는 의구심이 든다. 이 작품 자체만 봤을 때 위와 같은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렇게 부정적인 입장은 아니고 개인적인 의문이 들어서 기록으로 함께 남겨본다.


전체적인 구조 자체는 탄탄했다. 배경 설정과 이야기 전개, 반전 요소와 결말까지 정석적인 구성이었다고 생각한다. 작품을 다 보고 나서야 각 인물들에 대한 평가를 내릴 수 있었지만, 작품을 읽는 도중에는 각 인물들에 대한 평가가 시시때때로 바뀌는 경험을 했었다. 그만큼 의도대로 잘 구성된 구조 형태라고 생각한다.


오래간만에 읽는 외국 소설의 번역본이기도 했고, 마침 최근에 읽은 책들이 한국, 일본 작가들이었기에 책을 읽을 때의 느낌이 남달랐다. 번역본 소설이 내용 전달이 잘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정서와 문체에 차이가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어느 한쪽이 좋고 싫고 하는 것은 아니고, 각각의 장단점이 있는 것 같다.


결국 작품의 주된 줄거리는 가짜 테라피스트이자 가짜 사립탐정에게 속아 넘어간 앨리스의 이야기이지만, 더 상위의 관점에서 보면 작가에게 보기 좋게 속아 넘어간 독자의 이야기로도 볼 수 있겠다. 테라피스트에게 치료를 받는 테라피스트. 속고 있는 작품 속 주인공을 보면서 본인도 속아 넘어간 독자. 테라피스트도 상담을 받는다는 작품 속 언급은 이런 전체적인 구조에 대한 은유는 아니었을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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