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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 작별인사, 김영하

존재의 완전함을 위한 고민이 되레 그 존재의 필요성을 부정하게 되는 역설

by 김주렁

0. 들어가기에 앞서


호흡이 긴 장편소설은 아니었지만 생각할 거리가 많아서 그 길이에 비해 읽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만큼 흥미로운 주제와 소재가 많았던 글이었고, 읽는 동안과 읽은 후에 여운이 많이 남았었던 작품이다.


1. 작품의 전반적인 배경


작품의 기본적인 배경은 SF이며, 고도의 기술 발전과 이에 얽힌 인간성과 자아, 생명에 대한 고찰이 작품의 주를 이루었다. 기술의 최정점을 뽐내는 SF이지만 역으로 인간성이 주제가 되는 경우가 더러 있다.


'터미네이터', '아일랜드', '에이아이', '트랜샌던스'같은 영화, 애니 중에서는 '사이코패스(Psycho-pass)', 최근에 읽은 책들 중에서는 김초엽 작가님의 SF 소설들이 그러했다. 위와 같은 이야기들은 크게 두 가지 방향을 보여준다. 기술의 최정점에 올라서더라도 결국 고민하고 갈등하는 주체는 인간이라는 점이 첫 번째이며, 두 번째는 인간에 가까워질 정도로 발전한 인공지능이 점차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선택을 벗어나 인간과 동일한 첫 번째 고민을 하게 되는 것이다.


갈등하고 고민하는 것은 그 존재의 불완전함을 바탕으로 한다. 끊임없는 번민을 통해 사람들은 절대적인 진리를 향해 나아가면서 이를 극복하고자 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고민의 끝에 위치한 것은 그 존재의 불필요함이다.


완전무결한 존재는 고민하지 않는다. 고민이 불필요하다. 이미 답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완전무결해진 시스템은 개별 객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절대적인 명제가 있다면 개개인의 판단은 불필요한 노이즈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존재의 완전함을 위한 고민이 되레 그 존재의 필요성을 부정하게 되는 이 역설이 이 작품의 주된 골자였다고 생각한다.


2. 제목의 의미


작가의 말에서 김영하 작가는 '작별인사'보다 더 맞는 제목은 떠오르지 않는다고 말한다. 2년 전 초고의 제목은 '기계의 시간'이었다고 하지만, 이야기를 개작하게 되면서 제목이 맞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작별인사'라는 말이 그렇게나 잘 맞았던 이유는 무엇일지 궁금해졌다. 그런데 작품에서 인사를 건넨 작별이 있었는지 싶다. 주인공인 철이가 끌려가게 되면서 일어난 휴먼 매터스 및 아빠와의 작별, 끌려간 수용소가 공격당하면서 겪게 된 공동체로부터의 작별, 민이가 공격받게 되면서 일어난 작별, 선이 와의 작별, 달마가 있는 공동체와의 작별, 철이와 자신의 육신과의(물리적 세상과의) 작별, 철이와 아버지(최박사)와의 작별, 다시 만난 선이와 철이의 작별, 철이와 세상의 마지막 작별. 마지막 두 개의 작별을 빼면 모두 인사할 겨를은커녕 강제적으로 헤어진 상황이었다. 선이와 철이의 마지막 작별은 어느 정도 시간이 있었지만 마지막 그 순간만큼은 함께 있지 못하여 인사를 나누지 못했다. 철이가 마지막으로 세상과 작별을 고하는 순간에는 소설이 끝나게 된다.


그럼에도 작별인사가 제목이 된 이유는 왜일지 생각해보았다. 작별은 가장 표면적으로 생각해보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헤어짐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사람과 휴머노이드, 휴머노이드와 네트워크 사이의 구분과 분리가 어려운 상황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런 경계선이 뚜렷하지 않은 상황에서의 작별은 기본적으로 어떤 두 존재가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음을 내포한다. 작별하며 인사를 건넬 수 있다는 것은 아직 자신을 잃지 않고 세상과 본인의 경계선을 공고히 세우고 있다는 뜻이다. 작별인사라는 단어의 상징성은 아직 자신을 잃지 않았음에 대한 선언과 표지가 아닐지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3. 유한성, 한계, 경계


작품에서 지속적으로 다뤄지는 소재들은 경계성이라는 공통분모를 갖는다. (사람의 생의 유한함, 선미가 말하는 모두가 연결되는 우주정신, 철이가 접속하게 되는 네트워크, 달마를 포함한 통합된 의식인 기계 지능, 사람과 휴머노이드와 클론을 구분하는 경계 등)


무한한 확장은 전지전능함이 되지 않는다. 확장은 세상과 본인의 경계선을 무너뜨리고 나를 전체에 녹아들게 한다. 이는 결국 개별성의 소멸과 획일화로 이어지게 된다. 영생이라는 탐스러워 보이는 과실은 곧 죽음이었다. 물컵에 든 물이 바다로 흘러나가면 어디든 갈 수 있겠지만 더 이상 물컵 안의 물이 될 수는 없다.


그런 면에서 생의 마지막 순간을 선택하고 끝맺음을 이뤄낸 철이의 의지가 감탄스러웠다. 생의 유한성 내에서 번민하고 성찰을 거듭하며 본인의 세상과의 경계를 무너뜨리지 않은 철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작별을 해낼 수 있었다.


철이는 소설과 영화를 필멸하는 인간들을 위한 송가라고 말한다. 영생하는 존재는 끝이 없기 때문에 이야기가 될 수 없다. 결말을 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철이는 본인의 이야기를 자신의 의지로 훌륭하게 끊어냈다. 그것이 작품이 끝나는 시점과 맞물려 울림이 더 컸다. 이후로 더 후일담이 이어지거나 했다면 결말의 힘이 약해졌을 것 같다.


4. 그 외


전체적인 감상 외에, 부분적으로 짧게 느꼈던 감상들을 남기며 글을 마무리해본다.


작품 초반에 두 번째 육신이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이후 이야기는 죽은 직박구리의 시체를 묻어주며 본인의 감정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 철이의 모습으로 이어진다. 작품을 다 읽고 나니 전체 이야기의 함축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품 초반 아버지를 '그'라고 부르는 호칭에 이질감이 있었다. 로봇 고양이 데카르트의 이야기까지 나오고 나니 자연스레 철이도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로봇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오래간만에 빠르게 추론하여 뿌듯하긴 했지만, 이야기 전개를 보니 의도적으로 초반에 공개한 것이었어서 만족감이 조금 줄었다. (나중에 '최박사'로 호칭이 바뀌게 되는데, 철이의 심정을 호칭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었다.)

휴머노이드의 노화된 정도를 '사용감'이라는 단어로 표현한 것이 기억에 남는다. 사용자와 도구의 관계에서 나오는 단어이기 때문에, 이런 단어가 언급되는 것 자체만으로 휴머노이드의 당시 취급과 지위를 생각해볼 수 있었다.

사람의 유한함과 가능성을 외치던 최박사의 말로가 휴머노이드만 있는 정신병원에서 머리에 칩을 이식받게 된 것임이 처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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