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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의 세월

-눈물-

by 희수 Feb 09.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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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글라스가 필요했다. 흐르는 눈물을, 퉁퉁 부은 눈을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 누구도 함부로 날 동정하면 안 된다 생각했다.  




외톨이

당장 아이가 갈 수 있는 어린이집이 없었다. 일반 어린이집에서 장애통합 어린이집으로 옮긴 지 얼마 안 됐는데, 나가라는 통보를 받았다. 아이의 담임선생님은 이 일을 공론화시키자고 했다. 부당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순한 자폐아이를 받으려고 우리 아이를 내보내는 거라며 담임선생님이 나보다 더 속상해했다. 하지만 난 싸울 힘이 없었다. 툭하고 밀치면 푹하고 쓰러질 만큼 몸도 맘도 지쳐있었다. 세상 모두가 나와 아이를 우주밖으로  밀어내는 듯했다.


원장은 장문의 편지로 우리 아이를 더 이상 맡을 수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아이가 어린이집 교구를 망가뜨리고 다른 아이들에게 피해를 준다는 내용이었다. 나도 알고 있었다. 우리 아이가 어떤 상태인지를...

 고추장이나 김치를 이불에 쏟는 일은 그냥 일상이었고, 고층아파트였던  베란다에서 방충망을 열고 물건을 떨어뜨리는 아찔했던 순간도 있었다. 그때 블록박스를 떨어뜨렸는데, 지나가던 아저씨가 맞을 뻔했다며 우리 집까지 쫓아올라 왔었다. 울며 죄송하다 수없이 고개 숙였다.


이렇게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히고 사느니 차라리 아이와 함께 영원히 사라지는 게 낫겠다 싶었다. 아무리 혼을 내도 아이는 자신의 잘못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러나 엄마인 내가 화난 것은 알아차렸다. 경험으로 채득 한 듯했다. 어린이집과  나를 통해서...

어린 시절 나처럼 사람에 대한 최초 기억을 공포로 인식할 것 같았다.  겁먹은  아이의 눈에서 상처받았던 어린 날의  내가 보였다.


엄마는 매일 아침 일찍 전화를 했다.

" 잤냐?"

" 응 약 먹었으니까."

불면증이 심해서 수면제, 신경안정제, 항우울제를 한 움큼씩 먹었다. 잠도 잘 자고 불안감도 사라졌지만 대신 약기운에 하루종일 축 늘어져 있었다.

" 어떡한다니? 테레비 보니까 그런 애들 많더라 "

엄마가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위로였다. 그리고 거리가 멀어 우리집에 다고도 했다.  나 역시 엄마가 와 줄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무치게  외로웠다.

엄마가 아니어도 좋으니까 나 같은 언니라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 말 없이 따뜻한 눈길로 바라봐 주기만 해도 좋으니까...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상실

남편은 나처럼 대가족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나와는 매우  다른 가정환경에서 자랐다. 내가 집에서 이리저리 차이는 돌멩이처럼 컸다면 남편은 외동으로 무한한 사랑을 받고 자랐다. 처음 시집에 인사를 갔을 때, 엄청난 환대를 받았는데, 그건 내가 며느리감으로 마음에 들어서라기보다 손자에 대한, 아들에 대한, 조카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때문일까? 남편은 둘째 아이의 장애를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난 매일매일이 고통인데, 그는 직장생활도 충실히 하고 아이들하고도 잘 지냈다.

" 왜 똑같이 폭탄을 맞았는데 너는 괜찮고 나만 아픈 건데?"

자주 싸웠다. 아니 내가 일방적으로 생떼를 부렸다. 모든 게 끝난 것 같았다.

당시 난 평소 불편했던 사람들과 인연을 끊어냈다. 내 세계가 종말을 맞이했으니 더 이상 그들을 받아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사람과의 관계뿐 아니라 세상이 주는 구경거리에도 흥미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좋아하던 소설도, 영화도, 드라마도, 음악도, 모두 재미가 없었다. 시끄럽고 성가셨다.

하루 중 가장 기다려지고 평온해지는 시간은 잠자기 위해 약을 먹을 때였고, 새벽 눈 뜰 때가 제일 힘든 시간이었다. 그냥 눈감았다 뜨면 10년의 세월이 훌쩍 지나갔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죽고 싶지는 않는데, 딱히 살고 싶지도 않은 그런 무미건조한 상태였다.


의사는 운동을 권했다. 정신적으로 힘들 땐 몸을 움직이고 , 몸이 힘들 땐 정신력으로 이겨내는 거라며 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런데 난 운동을 싫어했다. 원래 좋아하던 것도 못하고 있는데 하물며 싫어하는 것을 한다는 건 더욱 자신 없는 일이었다. 대신 예전에 댄스 스포츠를 배우고 싶었던 때가 있었으니, 그걸  하면 어떻겠냐고

" 우울증에 바람까지 나면 정신건강에 치명적인데..."

의사가 나를 웃겼다. 내가 농담으로 받자 의사는 심각하게 선례까지  이야기하며 주의를 주었다. 그만큼 내 상태가 위태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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