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달장애여서 특별해
나는 <빵점 엄마>로 브런치에 데뷔했다. 밖에서 일하느라 살림은 빵점인 엄마와 그런 엄마보다 더 똑소리 나게 살림을 사는 야무진 발달장애 딸에 관한 이야기였다. 브런치 발행 후 응원과 격려도 많이 받았지만, 걱정 어린 시선을 던지는 분들도 적지 않았다.
“나중에 아이가 본인 이야기를 썼다고 싫어하지 않을까요?”
“사람들이 딸에 대해 알게 되어도 괜찮아요?”
한 마디로 장애가 있는 딸을 일부러 만천하에 드러내어 공개할 필요는 없지 않냐는 말이었다.
굳이 대답하자면 나는 딸아이에게 미안하다. 그것도 아주 많이. 아이 이야기를 써서 미안한 게 아니라 그동안 당당하게 드러내지 못해서 미안하다. 딸아이가 발달장애라는 걸 알게 된 순간부터 어딜 가든 누구를 만나든 주눅이 들었다. 마치 아이의 장애가 나의 장애라도 된 듯 쉬쉬거리며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아이가 공부를 너무 안 해 속상하다며 “선생님 아이는 공부 잘하죠?” 하며 궁금해하는 학부모나 모임이 끝날 무렵 다음번 만날 때는 아이들도 데려오자는 친구들 앞에서 나는 합죽이가 되었다.
시아버님의 장례식장에서도 아이를 숨기기 바빴다. 상을 치르는 며칠 동안 친정 부모님이 서영이를 데려가 돌봐 주셨고 아이의 안부를 묻는 조문객들에게는 아이가 아파서 외가에 보냈다고 둘러댔다. 대중교통을 타면 아이가 갑자기 큰 소리를 내며 돌발 행동을 할까, 영화관에 가면 가만히 못 앉아 있어 사람들에게 방해가 될까, 여행을 데려가면 우리 부부가 너무 힘들까 봐, 주말에는 몸이 피곤하다고. 아이를 외롭게 혼자 두었던 변명거리는 수없이 많았다. 초등학교 운동회 날 어느 무리에도 끼지 못해 멀뚱멀뚱 혼자 서 있던 아이가 눈에 밟히면서도 그 모습을 보는 게 가슴 아파 참석하지 않은 해도 있었다.
딸아이의 초등학교 졸업식 날이었다. 워낙 작은 학교라 졸업식도 조촐했다. 딸이 졸업한다며 한껏 얼굴이 상기된 남편과 달리 나는 발걸음이 썩 내키지 않았다. 빨리 졸업식이 끝났으면 하는 생각뿐이었다. 학교 입구에서 꽃 한 다발을 사서 강당으로 향했다. 학사모를 쓰고 까만 졸업 가운을 입은 서영이가 두리번거리는 모습은 멀리서도 보였다. 졸업생들이 한 명씩 무대로 나와 멋진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은 후 교장 선생님께 졸업장을 받았다.
서영이 차례가 가까워졌다. 혹시 아이가 실수라도 할까 싶은 걱정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줄 서 있는 동안 계속 뒤를 돌아다보며 눈으로 나를 찾던 아이가 제 순서가 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당당한 걸음으로 무대로 올라갔다. 엄지와 검지로 턱 밑에 브이를 그리며 씩 웃어 보이는 모습을 본 학부모와 친구들은 “와!” 탄성을 질렀다. 두 손으로 공손하게 졸업장을 받는 서영이를 교장 선생님이 꼭 끌어안아 주셨을 때 나는 미안하고 감사한 마음에 눈시울을 붉혔다. 내가 아이를 외면하며 같잖은 변명을 댈 때도 아이는 6년의 삶에 최선을 다했다. 잘 해낼 수 있다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선생님들 덕분이었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였지만 굳세게 일어섰던 그 시간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갔다. 유종의 미가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아이는 매일 한 뼘씩 자랐다. 첫 제주도 여행을 다녀온 다음부터 함께 여행 다니고 쇼핑 가고 데이트하는 날이 늘어났다. 혼자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아졌고 뭐든 스스로 하려고 애쓰는 기특한 아이의 일상을 남겨보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인스타그램이 나을까, 틱톡이 더 재미있을까 고민하던 어느 날, 한 글쓰기 모임을 알게 되었다. 호기롭게 시작했지만, 글쓰기의 기역도 몰랐던 내게 매일 쓰는 일은 고역이었다. 그저 일상을 끄적이는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시간만 보내고 있을 때 선생님이 딸아이에 대해 한번 써 보는 게 어떠냐고 조심스레 물어오셨다. 뭐라도 끄적여 보려니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생각만 해도 마음이 짠해 똑바로 보지 못했던 딸아이가 나보다 더 부지런하고 할 줄 아는 게 많았다. 깨워주지 않아도 혼자 일어나 학교 갈 준비하는 믿음직한 딸, 저녁 먹고 나면 시키지 않아도 운동을 나가는 부지런한 딸, 휴일 아침이면 졸음이 가득한 눈으로 안방으로 와 내게 안겨 사랑한다고 말하는 애교 많은 딸, 삼일절 아침 잊지 않고 태극기를 베란다에 꽂는 애국자 딸의 다채로운 모습이 보였다. 운 좋게 브런치 작가가 되고 그동안 관찰했던 아이의 모습을 담은 첫 글인 빵점 엄마를 발행하던 날 처음으로 딸아이를 사람들 앞에 선보이는 것 같아 하루 종일 심장이 콩닥거렸다. 글을 읽은 많은 분이 따뜻한 메시지를 보내주셨다. 한 분 한 분의 정성스러운 댓글을 읽으며 감동했고 세상엔 나쁜 사람보다 좋은 사람이 더 많다는 걸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어릴 때보다 수월하다고는 하나 아이를 데리고 외출할 때 신경이 쓰이는 건 매한가지였다. 남들 눈 찌푸릴 일 만들까 염려되어 외출 전 미리 주의를 주지만 우리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얼토당토않은 일이 생길 때가 있었다. 집에서 조금만 걸어 나오면 앞산 벚꽃 거리가 있었다. 벚꽃 시즌이 되면 그곳은 여기저기 울려 퍼지는 벚꽃 엔딩 노래와 함께 인산인해를 이뤘다. 흩날리는 벚꽃과 함께 내 마음도 하늘 위를 둥둥 떠다녔다.
우리 부부는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토요일이면 서영이와 꽃구경을 하며 천천히 그 일대를 산책한 후 노상에서 옛날 통닭과 맥주를 파는 곳에 들렀다. 통닭을 배불리 먹고 맥주 한 잔을 마시며 이야기 나누는 동안 서영이는 이어폰을 꽂고 몇 블록 거리를 소화도 시킬 겸 왔다 갔다 걸어 다녔다. 음악을 들으며 제 흥에 못 이겨 뛰다 걷다 하는 아이를 누군가 이상한 사람이라 오해했던지 경찰이 출동했다. 신고받고 왔다는 경찰에게 우리는 영문도 모른 채 해명해야 했다.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 딸이라고. 누가 신고했는지도 모르니 화를 낼 수도 없는 일이었다. 아무에게도 해를 가한 적 없는데 왜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나 울화통이 치밀었다. 기분 좋은 봄날 그런 황당한 일을 겪은 이후 다시는 통닭을 먹으러 그곳에 가지 않았고, 벚꽃길이 아무리 예뻐도 걸으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빵점 엄마를 브런치에 올리고 난 뒤 나에게 왠지 근거 없는 자신감이 생겼다. 약간 느릴 뿐인 아이가 안쓰럽고 부끄러워서 숨기기보다 울타리 밖의 세상도 보여주어야겠다는 용기가 생겼다. 내 도움이 필요 없다고, 혼자서도 잘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앞으로도 딸아이는 분명히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내 주위의 평범한 사람들을 믿어보려 한다. 세상에는 복잡한 길에 웬 장애인이 돌아다닌다며 아이를 신고했던 생각 없는 사람도 있지만 편견을 가지지 않으려 노력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확신이 생겼기 때문이다.
엄마인 나보다 더 알뜰살뜰 아이를 챙겼던 선생님, 산만하고 눈치 없는 아이를 반갑게 맞이하며 거리낌 없이 보듬어 준 모임 사람들, 일선에서 느린 아이들의 인식과 처우를 개선하려고 발로 뛰는 멋진 분들과 부족한 글에도 공감과 배려 가득한 댓글을 달아준 많은 이들을 만나며 나도 또 다른 서영이를 돕고 싶다는 열망을 갖게 되었다. 내 글을 통해 발달장애아도 여느 아이와 똑같은 감수성을 가지고 있다는 걸, 삶을 즐길 줄 알며 타인을 위할 줄 안다는 걸, 그러니 발달장애아의 가정도 여느 평범한 가정과 다를 바 없다는 걸 더 많은 이들이 알게 된다면 좋겠다. 그리고 느린 아이들이 좀 더 친근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사회가 될 수 있도록 일조할 수 있다면 좋겠다.
봄을 알리는 꽃샘추위가 한창이다. 이 추위가 끝나면 곧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겠지. 이번 봄엔 오랜만에 가족이 함께 벚꽃 흩날리는 앞산 거리를 산책한 후 북적거리는 노상에서 통닭 안주에 맥주 한 잔 마셔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