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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패셔니스타 Feb 08. 2024

우리 그렇게 될 수 있을까 [2]

간절함이 낳은 믿을 수 없는 이야기

빨간 노트의 비밀

 “이름이 뭐야?” 물어보면 “이름이 뭐야?” 반향어로 되묻던 아이가 “저는 주 서영이예요.” 하고 말할 수 있게 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책의 다양한 삽화는 어휘를 늘리기에 좋았다. 책에 나오는 그림이 먹는 것인지, 타는 것인지, 입는 것인지 손 발짓으로 표현하던 아이가 “이건 사과, 사과는 먹는 거예요. 친구들이 수영해요.”라며 말할 때 너무 감격해서 눈물이 났다.

집 근처 도서관은 우리 놀이터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일요일 저녁이었다. 방을 걸레질하는데 서영이가 책을 펴고는 책 제목인 ‘이슬이의 첫 심부름’을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또박또박 읽는 것이었다.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에이, 설마! 글자를 읽는 건 아니겠지. 너무 많이 들었으니까 그냥 통째 외운 거겠지.’

 나는 혹시나 하며 서영이가 잘 읽지 않는 다른 책을 가지고 와서 제목을 가리켰다.

 “사과가 쿠.”

 받침은 어려운지 ‘쿵’을 ‘쿠’라고 읽었다. 오호라. 또 다른 책을 가지고 와 손가락으로 제목을 짚어 주었다.

 “강아지 또.”

 “아, 강아지 똥?”

 갑자기 방언이라도 터진 듯 글자를 줄줄 읽다니. 그건 정말 책 읽어 주기의 힘이었다. 내용은 잘 몰라도 한글을 조합해서 글자를 읽어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남편과 나는 펄쩍펄쩍 뛰며 기뻐했다. 학교 수업을 따라가는 건 언감생심 바라지도 않았다. 다른 아이들만큼 못하면 또 어떤가. 느리면 어떤가. 아이의 오늘이 어제보다 나아지고 있는데. 그렇게 조금씩 매일매일 어제보다 나아지던 서영이는 이제 용돈 기입장을 쓸 때 나보다 암산이 더 빠르고, 유적지의 영어 표지판도 더듬더듬 제법 읽는다.

현실에서 벗어나려 읽었던 The Secret

 서영이에게 한창 책을 읽어 주던 그 시절, 우리 부부는 경제적으로도 너무 힘이 들었다.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어 마구잡이로 책을 읽어가던 그때 <더 시크릿>이라는 책을 만났다. ‘생각으로 삶을 만들 수 있다’란 문구를 보고는 ‘책 팔아먹으려고 별짓 다 하네’라고 입을 삐쭉거렸던 기억이 난다. 그러면서도 나는 책에 적힌 대로 비전 보드를 만들고 10억짜리 수표를 출력해 방 천장에 붙여 놓았다.

 매일 아침, 잠 깨면 물끄러미 천장을 바라보며 은행에 현금 10억을 예치한 나를 상상했다.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 그때 내 상황과 다짐을 일기처럼 쓰던 빨간 노트가 있다. 이사 오면서 버린 줄 알았는데 며칠 전 책꽂이 사이에서 그 노트를 발견하곤 깜짝 놀랐다. 대구대 특수교육원에서 “유감이지만 발달장애입니다.”라는 말을 처음 듣던 날, 빼곡히 적어 놓은 메모를 발견했다. 닥쳐올 앞날의 불안감, 인터넷을 뒤적거리다 우연히 찾아낸 카더라 뉴스, 아이를 어떻게 키울지 하는 막막함이 노트 한 장에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우리가 바라던 서영이의 발달상도 나열되어 있었다. 그리고 맨 아래 적은 ‘나는 20년 후 서영이와 속 깊은 이야기도 할 수 있다.’라는 문장에는 줄도 여러 번 처져 있었다. 감회가 새로웠다. 이제 문장 속에서 상상한 20년이 정말 몇 년 남지 않았다.


 어제였다. 너무 낡아서 털털거리다 못해 끽끽거리던 내 애마를 정비소에 맡겼다. 갑자기 경고등이 들어와서 당황했고 점검이나 받아 보려고 들른 정비소에 종일 차를 맡겨야 해서 오전 일정을 하나도 소화하지 못했다. 발이 없어진 나를 대신해 친정아버지가 서영이를 데리러 가주셨다. 왜 엄마가 안 오고 할아버지가 데리러 오셨을까 궁금했던지 아이에게서 곧바로 전화가 왔다.

 “엄마, 차 정비소에 맡겼어. 차가 고장 났어.”

 아이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엄마, 차 고장 났어요?” 하고 되물었다.

 “응, 그래서 오늘은 엄마가 데리러 갈 수가 없어. 할아버지가 태워주시면 지하철 타고 집에 가서 점심 챙겨 먹어.”

 “네, 저 지하철 타고 집에 가서 혼자 점심 먹을 수 있어요. ”

 아이의 씩씩한 대답을 들으니 내 마음이 든든했다. 이른 아침부터 길에서 용을 썼더니 퇴근 무렵이 되자 삭신이 쑤셨다. 문을 열고 집에 들어서자, 서영이가 버선발로 쪼르르 달려 나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엄마, 뭐 타고 왔어요?”

“택시 타고 왔어.”

“엄마 차 고장 나서 정비소에 있어요?”

“응. 엄마 오늘 너무너무 힘들었어. "

 빨간 노트 속 밑줄 쫙쫙 친 문장이 떠올랐다. 속 깊은 이야기가 별 건가. 이심전심, 많은 말 하지 않아도 서로를 위하는 따뜻함이 전해지면 그만 아닌가.

 나는 아이를 가만히 껴안았다. 아니, 이제 아이 덩치가 나보다 더 크니 내가 안겼다고 해야겠다. 우리는 서로를 그렇게 한참 안고서 고단했던 하루의 끝을 따뜻함으로 채워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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