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뺄셈이 아니라 덧셈
목이 빠지게 주말을 기다리다 맞이한 금요일 아침, 오랜만에 집 근처 도서관에 들렀다. 한국 소설이 꽂힌 서가 사이를 어슬렁거리다 정유정 작가의 ‘완전한 행복’을 발견했다. 전부터 빌려보고 싶었지만, 도서관에 갈 때마다 늘 대출 중인 책이었다. 얼른 책을 빌려 집으로 돌아왔다. 침대 머리맡에 두고 잠이 오지 않으면 읽으려 했는데 첫 장을 넘기는 순간 도저히 내려놓을 수 없었다. 500페이지가 사흘 밤에 걸쳐 술술 넘어갔다.
이야기는 주인공인 신유나와 언니 신재인, 그리고 신유나의 재혼남인 차은호의 시선으로 흘러간다. 신유나에게는 전남편 사이에서 태어난 딸 지유가 있었고 차은호에게는 본가에서 어머니와 살고 있는 노아라는 아들이 있다. 은호는 노아와 함께 살고 싶지만, 유나는 온갖 핑계를 대며 노아를 데려오기로 했던 약속을 자꾸만 미룬다. 평소에는 나긋나긋하고 상냥하지만, 뭔가에 뒤틀리면 걷잡을 수 없는 분노를 비정상적으로 표출하는 유나가 은호는 무섭기만 하다. 사소한 다툼이 있을 때마다 며칠 동안 지유를 데리고 어디론가 사라지는 아내, 그때마다 은호는 그녀가 당연히 친정에 있다고 생각한다.
어느 날 또 별것 아닌 일로 부부싸움을 한 후 아내로부터 집을 떠나 있겠다는 일방적인 통보를 받은 은호에게 얼굴도 제대로 본 적 없는 처형 신재인이 찾아온다. 재인은 친정어머니가 더 이상 지유를 돌보아 줄 수 없으니 다시는 친정으로 오지 말라는 말을 하고 사라진다. 친정에 간 게 아니라면 도대체 아내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 부부싸움을 할 때마다 가 있겠다던 그 집이 친정이 아니란 말인가? 아무리 전화와 문자를 해도 유나는 대꾸 한마디 없다. 재혼 후 아내와의 갈등으로 아이를 만나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날이 늘어나니 은호는 어머니와 노아에게 면목이 없다. 어머니는 그럴 거면 재혼은 왜 했냐며 노기 어린 잔소리를 끝도 없이 늘어놓는다.
은호는 어쩔 수 없이 아내와 상의도 없이 어머니를 모시고 노아와 함께 집으로 온다. 가까스로 연락이 닿은 아내도 지유와 함께 집으로 돌아온다. 원래부터 좋지 않던 고부 사이였다. 아내와 어머니의 불꽃 튀기는 태도에 은호는 둘의 눈치를 보느라 어느 한 사람 편들지도 못하고 불편하다. 설상가상으로 노아가 무심코 던진 공에 지유가 맞는 사건으로 분위기는 극도로 냉랭해진다. 어머니는 대놓고 싫은 소리도 서슴지 않으며 노아도 이제부터 아빠와 함께 살아야 하니 당장 데려가라며 엄포를 놓는다. 아내와 어머니 사이에서 은호의 외줄 타기는 계속된다.
한참 후 기분이 풀린 듯 갑자기 상냥해진 유나가 색깔이 모두 다른 찻잔에 차를 끓여 내어 온다. 노아도 곧 데려올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며 어머니를 안심시키는 아내 덕분에 분위기도 한결 누그러진다. 차를 마신 후 긴장이 풀린 듯 쏟아지는 잠을 참지 못하고 노아와 함께 2층으로 올라간 은호는 다음 날 아침 자신의 옆에서 질식사한 아들의 주검을 발견한다. 아들을 잃은 슬픔에도 불구하고 평소 남편의 잠버릇이 고약하다는 아내의 말에 신빙성을 둔 경찰은 은호를 용의자로 대하고 모든 정황은 그가 불리하게 치닫기만 하는데. 은호는 모든 것이 혼란스럽기만 하다. 그는 정말 아들을 죽인 걸까?
재혼을 결심하기 전 아내는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했다. 행복이 뭐냐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뭐라 말해야 할지 난감해하던 은호는 행복한 순간을 하나씩 더해가면 결국 행복한 인생이 되는 것 아니냐며 되묻는다. 그러자 유나는 행복은 덧셈이 아니라 뺄셈이라고 말한다. 완벽한 동그라미 하나를 만들기 위해 주위에 붙은 군더더기를 하나씩 지워나가듯 그녀의 삶에 행복만 남을 때까지 불행의 가능성마저 모두 없애야 하는 거라며.
유나는 완벽한 행복을 머릿속에 선명하게 그리고 있었다. 보통 사람은 삶에서 부딪히는 수많은 장애물을 그저 감내하거나 극복하며 살아간다. 그들의 동그라미가 이가 맞지 않고 울퉁불퉁하더라도, 그 모양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유나는 자신이 꾸린 행복에 조금이라도 방해 요소가 있으면 이를 외면하거나 아예 제거해 버렸다. 그것이 한때 사랑했던 사람이나 가족일지라도. 거슬리는 상황이나 존재가 나와는 상관없는 것으로 치부하는 행위가 ‘외면’이라면 그 존재를 품고 참아내며 내 안에 서서히 동화시키는 행위는 ‘감내’다. 감내하는 삶은 지금 당장은 고통스럽겠지만, 끝내 변화하고 성장한다. 외면하는 삶은 당장은 편하겠지만 끝내 모두에게서 외면당한다. 자신만의 이기적인 행복을 위해 타인의 행복은 아랑곳하지 않고 폭주하던 유나의 씁쓸한 결말에 긴 한숨이 나왔다.
빠른 전개 탓에 숨이 막힐 정도로 목을 죄어 오던 분위기도 시종일관 섬찟한 데다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쓴 소설이라 하여 며칠 동안 섬뜩한 기분이 가시질 않았다. 무엇보다 소설 속 인물의 피해망상이 나에게 전염된 것 같았다. 이제는 마음에서 훨훨 날려 보냈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일들이 절절한 서러움으로 새삼 밀려들었다. 돌아가신 시아버님, 시댁 식구, 친정 식구, 친구들과의 별것 아닌 일화는 물론 어처구니없게도 까맣게 잊고 있던 어린 시절의 하루까지 문득 떠올랐다.
중학교에 다닐 때였다. 모범생 오빠는 대학 입시를 앞두고 학교와 독서실을 오가며 막바지 공부에 전념하고 있었다. 학력고사가 다가오자 잔뜩 긴장하여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하는 오빠를 위해 엄마는 아침부터 진수성찬을 차리곤 했다. 오빠가 먼저 한술 뜨고 집을 나서면 남은 반찬은 다음 타자로 등교하는 내 차지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하루는 내가 너무 일찍 일어나는 바람에 오빠와 함께 아침을 먹게 되었다. 짧은 식사 시간 동안에도 눈을 책에서 떼지 못하고 밥을 깨작거리는 오빠의 숟가락 위에 엄마는 이것도 먹어 보라, 저것도 먹어 보라 쉴 틈 없이 권하며 반찬을 집어 올렸다. 아들에게 하나라도 더 먹여 보려 애쓰는 엄마의 등쌀에 계속 눈치만 보다 소시지 반찬에 젓가락을 슬며시 갖다 대었을 때였다. 엄마의 매몰찬 손이 내 손등을 탁 때렸다. 손등 너머로 차가운 시선을 느끼며 움찔하고 있을 때 엄마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먹어야 하는 놈은 안 먹고 안 먹어도 될 놈이 먹네.”
엄마의 말이 한 음절씩 귀에 박혀 메아리쳤다. 나는 수저를 소리 나게 탁 내려놓고 내 방으로 가 책가방을 움켜쥐고 곧바로 집을 나섰다. 새초롬하게 추운 날씨였지만, 외투도 입지 않았다. 차라리 감기에 된통 걸려 죽어버렸으면 했다. 시름시름 앓으며 죽어가는 내 옆에서 아들만 편애했던 엄마가 눈물을 흘리며 미안하다고 말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하늘은 회색빛으로 잔뜩 흐렸고 이른 초겨울 바람이 얼굴을 매섭게 때렸다. 비인지 눈인지 모를 축축한 것이 학교로 가는 내내 얼굴에서 뚝뚝 떨어졌다.
자습 시간에 친구들이 담임 선생님이 낸 빡지 숙제에 집중하고 있을 때 나는 연습장에다 오빠가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수십 번을 휘갈겼다.
‘오빠만 없으면 부모님의 사랑을 원 없이 받을 텐데. 그러면 정말 행복할 텐데.’
어린 마음에 유전자부터 너무나 우월하여 아무리 노력해도 상대가 안 되던 오빠만 눈에 보이지 않으면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가졌다. 하지만 나쁜 믿음이 절대 충족될 수 없는 갈증을 불러일으키듯 내 비뚤어진 믿음은 아무리 마셔도 해소될 수 없는 질투를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모두의 기대대로 오빠는 서울 소재 대학으로 진학했고 졸업 후 취업과 결혼으로 서울 사람이 되어 버렸지만, 오빠의 빈자리를 향한 부모님의 변함없는 미련과 사랑에 나는 늘 질투가 났다. 내가 바라던 행복은 움켜쥐려 하면 할수록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신기루처럼 손아귀에서 빠져나갔다.
[3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