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명을 껴안는 사람들
도시는 오래된 기억처럼 낡고 퇴색해 있었다.
하늘은 흐렸고, 바람은 가볍게 먼지를 휘감고 돌았다.
버스 정류장 옆 작은 공원, 낡은 벤치 위.
한 청년이 가방에서 작은 피리를 꺼내 입에 댔다.
그는 불었다.
소리는 낮고 느리게, 그러나 분명한 결을 갖고 공기 속을 갈랐다.
마치 오래된 돌을 쪼는 듯, 조용하지만 단단한 울림이었다.
그리고—그 소리를 따라 한 사람이 다가왔다.
검은 코트를 입은 청년.
한 손엔 낡은 책이 들려 있었고,
책은 제목도 표지도 없이 무명의 얼굴처럼 묵묵했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조용히 물었다.
“그 피리… 어디서 난 거예요?”
피리를 불던 청년은 고개를 들지 않고 답했다.
“공장이었어요. 아무도 없던 제철소에서.
한 사람이 만들었어요. 말없이, 매일같이.
이건 그 사람이 만든 소리예요.”
코트 입은 청년은 책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건, 오두막에서 쓴 말이에요.
한 사람이 매일 한 문장씩, 열두 해를 채운 노트죠.
말없이, 조용히.”
둘은 그제야 서로를 바라보았다.
한 명은 피리를, 한 명은 문장을 들고 있었다.
소리와 말 사이, 공기 속엔 아주 얇은 떨림이 있었다.
그리고 문장 하나가 청년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말은 때로 냄새보다 느리다.
하지만, 더 오래 남는다.”
피리를 불던 청년은 조용히 웃었다.
“그래서 나는 소리로 말해요.
사라지지만, 그 순간엔 진심이 닿거든요.”
둘은 말을 멈췄다.
그저,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그리고 한 사람은 책을 펼쳐 문장을 하나 읽었다.
다른 한 사람은 피리를 들어 그에 어울리는 음을 불었다.
낡은 도시의 오후.
누군가는 지나가며 그 장면을 스쳐보았다.
누군가는 발걸음을 멈추고, 아주 잠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냥 지나쳤다.
하지만 그날, 도시는 아주 작게 울렸다.
소리도, 말도 없었던 공간 속에서
서로를 알아보는 두 사람이
새로운 세계를 조금씩, 조용히 만들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