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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잘못됐냐고 묻는다면,.. 글쎄? - Part 1

블루스 기타리스트 Roy Buchanan 이야기

by 김주영

거기엔 여러 색깔의 사람들이 있었다.

수많은 흑인들, 약간의 백인 소작농들, 드물게 보이는 멕시코 사람과 동양인까지,...

커다란 야외 천막 안에서 부흥회의 젊은 목사들은 뜨거운 열정으로 목이 터져라 설교했고, 참가자들은 아멘을 외치거나 손을 치켜들며 반응했다. 사람들은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고 몸을 흔들면서 노래했다.

부흥회 합창단은 'Just A Closer Walk With Thee'이나 'Swing Low, Sweet Chariot'같은 곡들을 밴드 없이 박수를 치며 불렀다. 단체로 화음을 넣거나, 솔로와 합창이 교차하는 콜 앤 리스폰스(Call and Response)로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분위기가 뜨거워지면서 통곡하거나, 신들린 듯 춤을 추는 사람들이 나왔다.

엄마 손에 이끌려 참석한 어린 나에게는 놀랍고도 감동적이었다. 나는 흑인들이 몸을 흔들며 찬송을 부르는 모습을 입을 벌린 채 한참동안 바라 보았고, 사람들의 목소리만으로 만들어지는 강렬한 리듬과 감정을 온몸으로 체험했다.

그때 나는, 음악에서는 온전히 자신의 감정만이 모든 것이라고 느꼈다.


내성적이었던 나는 혼자서 하는 것들에 빠져, 어린 시절을 지냈다. 나는 여러 가지 악기를 만지작 거리다가 블루스 기타를 치기 시작했고, 블루스 기타에는 한 사람의 마음을 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기타는 마음이고 성격이다. 내가 슬프면 기타가 울고, 기쁘면 웃어준다.

숱하게 많았을, 내 어렸을 적 성장통의 모든 순간에 음악이 함께 했다.

펜더 텔레캐스터로 연주한 맑고 깨끗하면서도, 필요할 때는 거칠고 격정적인 사운드는 나를 이끌었고 달래주었고 치유해 주었다. 그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사람들의 평가와 시선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내가 겪은 고독, 외로움, 걱정과 근심, 그리고 언젠가 내게 다가올 구원의 순간에 대하여 나의 기타 텔레캐스터에게 물어 봤고, 우리는 친구처럼 연인처럼 사귀었고 사랑했다.


내가 아는한 최고의 리듬 앤 블루스의 대가는 그리스계 미국인 '조니 오티스'이고, 그는 어린 나에게 무대를 만들어 주었다. 20살이 지나면서 나는 수년 간 로커빌리 가수 Danny Denver의 밴드에서 연주를 하며 워싱턴 D.C.에 정착했다. 아무 의미없는 얘기지만 다행히 주변에서 가장 뛰어난 기타리스트 중 한 명이라는 명성을 얻었던 거 같다. 젊었을 적 나는 리드 기타, 리듬 기타, 심지어 베이스 기타든 포지션에 상관없이 잘 나가는 유명한 사이드맨 생활을 이어갔다. 나의 감정과 손가락의 느낌에 의한 피킹과 핑거링이 만들어 내는 톤이 기계가 만들어내는 효과음보다 훨씬 감동적이고 섬세하다고 사람들은 평가해 주었다. 그런데 오래지 않아 사건이 생겼다.


'로이, 이거 한번 들어 봐. 얘는 괴물 그 자체야!'

20대 후반쯤에 사진기사인 내 친구 고세이지가 지미 헨드릭스의 '워싱턴 힐튼' 콘서트 티켓을 들고 나를 찾았다. 나는 헨드릭스의 무대를 봤고 그의 데뷔 앨범 'Are You Experienced!'를 듣고 적지 않은 충격과 혼란에 빠졌다.

나는 내 손과 내 기타 '텔레캐스터'로 힘들게 만들어낸 'Wah Wah' 같은 나만의 브랜드 사운드가 개량된 전자 페달로 멋지게 만들어지는 것을 보았무척 당황스러웠다. 나는 헨드릭스처럼 광기에 쌓인 무대를 연출할 수가 없었고 혹은 그러고 싶지 않았고, 결국 그런 생각은 이제는 구식이 되어가고 있는 내 스타일의 기타 피킹에 나 자신을 가두어 두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음악계의 유행은 빨리 변했고, 내 스타일은 그 변화에 잘 맞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단 한 순간도 나의 블루스 기타는 진심이지 않은 적은 없었다. 어쨌든 아들까지 생겨난 나는 음악 활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게 어렵다고 판단했고, 여러 가지 일들에 도전했다. 이발사와 무역은 당시 내가 선택한 직업 중 일부였다. 이발은 내가 음악을 떠나면서 급한대로 생활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방편이었고, 무역 일은 중장기적으로 안정적인 수입을 얻으려고 했던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 역시 쉽지 않았다.

결국 좋게 말하자면 음악에 대한 열정이 나를 다시 무대 위로 이끌었고, 1970년대 초 나는 음악 활동을 재개했다. 이전에도 앨범을 낸 적이 있었지만, 나의 모든 열정과 여러 고민을 섞어서 만든 'Roy Buchanan'이라는 앨범을 1971년에 발표하며 돌아왔고, 이 앨범은 내 이름을 미국과 영국에 널리 퍼뜨렸다. 대중이 아닌 기타리스트들에게 말이다.


그리고 나의 음악과 내가 걸어온 여정이 1971년 PBS 텔레비젼에서 1시간 분량의 다큐멘터리로 소개되었다. 존 레논을 포함한 많은 음악인들이 칭송한 이 다큐멘터리를 보고 롤링 스톤즈의 '키스 리처드'로부터 밴드에 참가해달라는 연락이 왔었다. 블루스를 특히 추구하였던 초창기 롤링 스톤즈의 멤버 '브라이언 존스'의 빈 자리를 메워 달라고 했다. 록계의 멀티 플레이어 시조격이자 천재로 불리는 브라이언 존스를 대체해야 한다는 곳은 큰 부담을 주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나는 롤링 스톤즈에서는 내 스타일의 음악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거기에는 확고한 음악적 개성으로 똘똘 뭉친 믹 재거가 그의 음악을 활발히 펼치고 있었고, 어쩌면 그를 따라 마약과 알코올을 정신 없이 남용해야 한다는 불안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거절했고, 그 자리는 미크 테일러로 채워졌다.



(Part 2 완결로 이어집니다)


브라이언 존스를 대체하여 믹 재거가 영입되었다는 오류 바로 잡았습니다.


아래 링크에서 로이 부캐넌의 음악을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가장 위대한 무명의 블루스 기타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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