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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잘못됐냐고 묻는다면,..글쎄? - 2 (완결)

블루스 기타리스트 Roy Buchanan 이야기

by 김주영

어렸을 때부터 나는 귀로 듣고 느낀 것을 나의 팬더 텔레캐스터로 반응해 보려고 노력해 왔어. 듣고 느낀 것을 술취한 사람들이 우글거리고 술병과 욕설이 날라 다니는 홍키 통크 무대에서 표현하려고 했지. 쉽지도 않았고 제대로 되지도 않았지만. 어쨌든 내 감정, 내 방식대로의 음악을 소중하게 생각했고, 현란한 테크닉보다는, 내 느낌을 자연스럽게 담아내려고 집중해 온 거 같아. 나는 그게 내가 음악을 하는 이유이고, 또 블루스의 정서라고 생각해.


솔직히 새로운, 뭔가 감동적인 소리를 내려고 별 짓을 다 했던 것도 같아.

앰프 설정을 바꾸고, 볼륨과 톤 노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피크 대신 손가락을 사용해서 다양한 뉘앙스를 만들어 내기도 했어. 이런 것들은 지금 생각해 봐도 필요했고 참신한 기교였어.

그리고 수동적인 방법으로 여러 가지 이펙트를 만들어 내기도 했지. 기타의 음색을 변형시키고, 감정적인 표현을 극대화하려고 무척 애를 썼는데, 이제는 그런 기교들이 죄다 소용이 없어져 버린 거 같아. 내가 했던 섬세한 피킹 테크닉, 끈적거리는 톤의 핀치 하모닉스, 피치를 양껏 끌어 올리는 슬라이드 연주, 톤이 아주 부드러워지고 더 깊은 감정으로 인도하는 비브라토 그리고 팔꿈치와 손목을 이용한 미세한 톤의 변형, 이런 아름다웠던 것들의 가치가 점점 시들어지는 거 같아.

대중들의 마음은 예측할 수 없어. 사람들이 언제 방을 나갔다가 언제쯤 방문을 열고 다시 돌아올 지,...

내가 늦는 건지, 잘 맞추지 못하는 지,...


드물게 이해해 주는 사람들이 있기는 해.

면도날이라 불리는 기타리스트 제프 벡은 자신이 연주곡으로 편곡한 Cause We've Ended as Lovers를 내게 헌정하기도 했지. 그건 아마도 그가 날 고독한 예술가로 생각하고 나름의 위로와 공감을 담았는 지도 모르겠어. 내가 인기에 영합하지 않고 나름대로 끊임없이 발전을 추구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야. 사실 나도 인기 좋아하고, 단점도 많아서, 잘 변하려 하지 않고 게으르기까지 한데 말이다.


1981년 나는 팔리는 음악만을 강조하는 애틀랜틱 레코드에 녹음을 그만 두겠다고 통보했다. 내 방식대로 내 음악을 녹음하지 않는 한 스튜디오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았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욱하는 감정에 저지른 옳지 않은 행동이었다.


1985년 나는 카네기 홀에서 로니 맥, 앨버트 콜린스와 함께 공연을 했다. 한마디로 최고의 블루스 록 대가들이 모인 보기 드문 협연이었다. 나의 새로운 레이블은 '엘리게이터'라는 새로 생긴 작은 음반사로, 표현에 있어서의 모든 권한을 내게 일임한 상태였다. 나는 어디에도 구애받지 않고 연주를 했다. 사실 거의 언제나 자유롭게 연주해 왔지만 말이다.

맥과 콜린스, 그들 또한 자유로운 연주와 음악적 실험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들이다. 나는 자유롭게 내 스타일을 보여주었고, 맥과 콜린스는 블루스와 록을 넘나드는 깊이 있는 연주로 무대를 빛냈다. 그들 역시 자기만의 음악적 진정성을 추구하였고 팬들의 진심 어린 박수를 받았다. 나는 When A Guitar Plays the Blues를 포함하여 몇 곡을 단독으로 연주했고, 그 유명한 로니 맥의 Further On Down The Road를 모두 함께 연주하며 피날레를 장식했다. 그 곡은 B.B. King과 Taj Mahal의 버전도 괜찮지만, Lonnie Mack만의 해석은 유독 진심이 느껴지는 블루지한 터치가 압도적이다. 블루스와 로큰롤, 거기에다 대중성과 펑키한 색깔까지 다 섞은 기타리스트, 로니 맥, 그는 위대한 대중 음악가임에 틀림 없다.


공연이 끝난 후 난 커다란 공허를 느꼈다.

나는 명확하게 알았다. 그들과 나와의 차이점을,

그들 역시 자신만의 굳건한 세계가 언제나 있지만, 팬들이 원하면 기꺼이 스스로와 타협하여 팬들에게 옆 자리를 내어 준다. 유연하고도 바람직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난 그렇게 하지 못했다.


공연을 마치고, 친구들과 헤어져 호텔 바에서 혼자 술을 마셨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연주를 마쳤는데도 청중의 환호가 공허하게 들려 왔고, 가슴은 커다란 구멍이 뚫린 듯 멍멍 하였다.

몇 병을 마신 다음 난 나의 음악과 인생에게 대답했다.


'나한테 뭐가 잘못됐냐고 묻는다면… 글쎄? 나도 모르겠어.'


그리고 잠시 뒤 말을 이었다.


'숫자가 좀 적으면 어때! 한 두 사람에게서라도 인정을 받는다는 거, 그것도 간단한 일은 아니잖아, 잘 알지 않아? 그것도 매니아들이 인정해준다면 그건 참으로 영광스러운 일 아니겠어? 난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로부터 3년 뒤인 1988년 로이 부캐넌은 '공공장소 주취'로 기소되어, 버지니아주 페어팩스 구치소에 수감되었고, 다음 날 사망된 채 발견되었다. 그의 나이 48세였다. 보안관은 자살이라고 했고, 또 다른 목격자는 머리에 심한 타박상이 있었다고 진술했다.




아래 링크에서 로이 부캐넌의 음악을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가장 위대한 무명의 블루스 기타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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