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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윤 Jul 07. 2024

불운을 액땜 삼아 출발할 시간

02. 여행준비



 정말 오랜만에 혼자 떠나는 여행이었다. 육 개월도 전에 회사에 휴가 날짜를 공유하고 바로 비행기 티켓을 예약해 버렸다. 그때만 해도 여행의 모습을 상상하고 그곳에서 이뤄내고 싶은 것들을 떠올리면 설렘이 가득했다. 아득한 미래처럼 멀리 느껴졌기 때문인 것 같다. - 지금의 나는 엉망이지만 육 개월 뒤의 나는 어쩐지 멋지게 해낼 것이란 착각 속 - 하지만 시간이 다가올수록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확신에 휩싸이고 말았다. 이번 휴가를 쓰고 나면 또 몇 년은, 아니 어쩌면 다시는 갖기 힘든 시간일 텐데. 나를 정리해 볼 수 있는 기회인데. 이 시점에 그 찬스를 사용해 버리는 것이 맞는 걸까? 단지 안식 휴가를 쓰는 것뿐인데, 나는 또 스스로를 끝으로 끝으로 밀어가며 그놈의 ‘의의’를 찾으려 하는 중이었다.


 마음이 불안해서인지 나는 출국을 일주일 앞두고, 5년간 한 번도 걸리지 않았던 감기를 지독하게 앓았다. 신종플루에 걸렸던 스무 살 이후 열이 39도까지 오른 건 처음이었다. 설상가상 일은 왜 이렇게 많은지! 쉴 틈 없이 코를 풀다 일을 하다 기침을 내뱉고 벌게진 얼굴로 퇴근을 했다. 그래도 휴가 때 아프면 정말 끝이라는 생각에 점심시간에는 병원으로 달려가

 “제가 정말 다음 주에 아프면 안 되거든요.. 켁켁켁..” 거리며 옵션을 있는 대로 추가한 수액을 맞았고,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바로 쓰러져 10시간 넘게 내리 잤다.


 그렇게 겨우 인간의 몰골과 안도의 마음을 잠시나마 되찾은 여행 전날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짐을 챙겨보려고 창고를 열어본 순간 등 뒤가 서늘해지며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비현실적 광경에 다시 문을 꾹 닫고 말았다. 아닐 거야. 이건 꿈일 거야. 몇 번을 되뇌다 혼자서는 도저히 이 상황을 감당할 수가 없어 남편을 끌고 와 앞세워 다시 창고를 열어보았다.

 

  아니, 이게..

 루버형 창문은 어찌 된 일인지 방충망까지 열려 있었고, 한 마리 아니 어쩌면 여러 마리였을지 모를 새의 치열한 사투의 현장이 펼쳐졌다. 언제였을까? 아무도 모르는 사이 우리 집 한편에 야무지게 둥지를 틀어보려던 녀석은 루버형 창이 영 다루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나뭇가지 한 가득과 이곳저곳에 분노의 분변을 흩뿌린 채 사라져 있었다. 내 캐리어는 바로 그 사건 현장 가운데에 놓여 있었고..


 엉망이 된 캐리어를 닦아내면서 몇 번이나 울컥했는지 모른다. 아니 이게 말이 되는 상황인가. 이 정도면 이 여행을 가지 말라고 미래의 내가 신호를 보내는 게 아닐까. 안 그래도 나도 불안한 마음이 가득하다고! 어딘가 화풀이할 곳이 있다면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 모든 시간은 흘러갈 뿐이며 이 여행은 내 선택이다. 재수가 좀 없었다고 하더라도 팔자 좋게 혼자 떠나는 내 편을 들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걸 안다. 조용히 캐리어나 깨끗이 닦아야 한다.  


 그렇게 묵묵히 흐르는 시간 속에 떠나는 날은 오고야 말았다. 불운을 액땜 삼아 출발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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