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고 아린 나의 신혼 시절 이야기
음식을 할 때 양조절을 할 수 있는 것도 숙달이 된 후에야 가능하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엄마가 해주시는 밥만 먹으며 학교만 다니다가 유학을 가게 되는 바람에 어쩌다 보니 이른 나이에 결혼까지 하게 되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남편도 어렸고 나도 참 어렸다.
그리고 하필 한국사람도 거의 없는 곳에서 남편과 단둘이 유학생활을 시작했다.
사는 곳이 도시가 아니었고 산과 바다만 있었다.
집에서 나와서 길을 건너면 KFC와 Pizza Hut 이 있는 번화한 곳에서 거의 평생을 살았던 나는 아무리 노력을 해도적응이 안돼 참 힘들었다.
심심하고 심심하고 따분했다.
지금은 일부러 그런 시골만 더더 시골만 찾아다니지만 젊고 어렸던 나는 자연이 지루했다.
주말이 되면 그곳에서 갈데라고는 도시락을 싸서 바닷가로 산으로 피크닉을 가는 것 정도였다.
그 주말도 그랬다.
남편과 나는 내일이 토요일이니 김밥을 싸서 바닷가에 가서 놀다 오자 했다.
학생이지만 잘하지도 못하는 요리를 좋아하는 새댁이기도 한 나는 금요일 저녁에 호기롭게 김밥을 싸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먹는 김밥.. 몇 줄을 싸야 할까?
정말 많이 싸도 대여섯 줄이면 되는 거 아닌가?
얼만큼의 재료준비를 해야 하는 줄도 몰랐고, 이만큼의 재료가 몇 줄의 김밥이 나오는지도 몰랐던 나는 오후 내내 계란을 부치고 시금치를 무치고 당근을 볶았다.
아주 많이...
응답하라 시리즈에 '덕선이 엄마', '나정이 엄마'를 생각하시면 된다.
그 산더미 같은 재료로 김을 척 깔고 김밥을 싸기 시작했다.
밤 11시가 되도록 김밥을 쌌다.
한 20줄도 넘게 쌌을 것이다.
김이 모자라고 밥이 모자라 그만뒀으니까...
김밥집 아줌마를 상상하며 참기름을 듬뿍 발라 그 20줄도 넘은 김밥을 다 썰었다.
다....
그리고 그 썰은 김밥을 아주아주 큰 쟁반 같은 것에 3단 케이크처럼 쌓아 올렸다.
지금 같으면 쿠킹포일에 한 줄씩 싸놓던지 했을 텐데 그때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 많은 김밥을 보고 당황을 해서 어쩔 줄을 모르고 그저 접시에 쌓기만 했었다.
저렴한 뷔페집에 가면 볼 수 있는 모양의 김밥케이크가 나왔고 내일까지 이 김밥을 어떻게 보관해야 하는지 또 당황하기 시작했다.
냉장고에 넣자니 밥이 딱딱해질 것이고 그대로 식탁에 두고 잤다가 밤새 아까운 김밥이 상할까 봐 생각하고 생각해 낸 것이 베란다였다.
베란다에 두고 자면 밥도 딱딱해지지 않을 것이고 시원한 공기로 상하지도 않을 것이라 생각이 들자, 나는 정말 천재다라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가장 큰 쇼핑백을 자르고 이어 붙여 김밥케이크 덮개를 만들어 세상 조심히 덮어 베란다에 두고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잠을 잤다.
모처럼 여유롭게 일어난 아침의 공기가 상쾌하고 찌뿌둥했던 몸의 피로도 풀리는 기분이었다.
콧노래를 부르며 피크닉 갈 차비를 시작했다.
물도 챙기고 음료수도 챙기고 과자도 넣고 비치타월도 꺼내고..
마지막으로 김밥을 챙겨 집을 나서려고 베란다 문을 드르륵 연 순간...
김밥을 덮어놓은 종이봉투의 모양이 좀 이상하다 하며 자세히 들여다보니 접시 위에 산처럼 쌓여있던 김밥은 당근조각 몇 개와 시금치 쪼가리만 남아있고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베란다 바닥은 온통 너구리들의 발에 묻은 참기름 발자국으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믿어지지가 않아서 베란다 바닥에 한참을 쭈그리고 앉아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뒤늦게 베란다에 나온 놀란 남편을 돌아보며 둘이 박장대소를 하며 웃었던 것 같다.
그날 피크닉을 갔었는지 안 갔었는지 무얼 먹었는지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함께 마주 보고 아주 많이 크게 웃었던 것 같다.
고단한 유학생활을 하며 그렇게 크게 웃을 일이 많지는 않았는데, 그날은 둘이 마음껏, 오래도록 웃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너구리들이 김밥을 모조리 먹어치운 것도 우습지만 그 많은 김밥을 싸서 산처럼 쌓아 올린 내가 더 웃겨서 웃는다.
신혼시절은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지만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서 어쩔 줄을 몰라하며 매일 당황을 했었기에 한편으로는 마음이 아리도록 아프다.
김밥만 보면 생각나는 너구리들의 김밥파티..
미국 너구리들은 그렇게 나의 김밥이 맛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