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3절
"우리는 모두 이 땅의 아들딸이다. 그러나 이 땅은 우리를 버렸다." - 황석영 소설 [장길산] 중
♪ Chicane – What am I Doing Here
“나는 미국에 와서 비로소 내가 ‘미국에 살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죠. 그렇다면 내가 이민 전에는 어디에 살고 있다고 생각했을까요?”
전임의 수업 시간에 특별한 손님이 와서 이런 질문을 했다. 알렉산스라 해리슨 교수님은 정신분석가이자 미국 1세대 이민자인 살만 악타(Salman Ahktar) 선생님을 초대해서 우리에게 이민(immigration)과 문화 적응(acculturation)에 대한 강의를 해주셨다. 이민자 가족을 외래에서 많이 만나게 되는 전임의들에게 그들의 경험을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자리였다. 하지만 이 수업은 나에게 좀 특별하게 다가왔다. 전임의 동기들 중 1세대 이민자는 내가 유일했다. 이 수업은 ‘그들‘에 대한 내용이 아니라 ‘나’와 ‘나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였다.
“인도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했겠죠.”
우리 중에 한명이 대답했다. 이게 정답이었으면 질문에 교육적인 가치가 없었을 것이다. 악타 선생님의 답변은 나에게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다.
“아니에요. 인도에서 살 때는 나는 내가 어디에서 살고 있는지를 그다지 인지하지 못했어요. 나는 그냥 ‘살았을 뿐’이죠 (I just lived).”
이 수업을 들을 무렵 나는 쉐리의 가족 치료를 진행하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국가와 그 내부의 특수한 환경이 가족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미국이라는 새로운 사회로 건너와서야, 내가 ‘한국’이라는 특수 환경에서 태어났고 살았다는 사실을 체감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내가 태어나고 자라났던 우리 가족 역시 격변하는 한국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이야기를 써나간 구성원들이었다는 점을 말이다. 쉐리의 가족에서 보았듯이, 가족 내부에서 구성원이 맡게 되는 배역은 가족 외부 환경에 큰 영향을 받는다. 모든 가족은 역사와 문화이라는 맥락 안에서 존재하고 그에 맞게 적응하기 때문이다.
중학교 시절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박하사탕]을 봤던 기억이 난다. 2000년 한 토요일 오전, 천호극장. 중학교 영화감상부가 아무도 없는 상영관 2층을 차지하고 앉았다. [박하사탕]은 그날 연속 관람으로 보았던 영화 두편 중 하나였다. 나머지 한 편의 영화 제목도, 청소년 관람 불가 영화를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 모두 기억이 흐릿하다.
[박하사탕]은 상당히 혼란스러운 영화였다. 그전까지 즐겨봤던 권선징악의 명쾌한 줄거리가 아니었다. 주인공 영호(설경구 분)가 왜 경찰 신분에도 다른 사람을 괴롭혀야 했는지, 왜 군인인데 다른 시민을 쫓아야 했는지 알 수 없었다. 영화가 역사적 배경을 부연 설명해주지 않아 당시에는 다소 불친절한 영화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영화 속에서 시간은 거꾸로 흘러갔다. 나는 상영관을 나와 버스를 타고 집으로 오는 길에 걱정에 휩싸였다. 그 다음주까지 써내야 하는 A4용지 두 장 이상 분량의 감상문을 무슨 내용으로 채울지가 도통 생각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도대체 이 영화를 보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가 궁금했다. 인터넷에서 영화 후기들을 읽기 시작했다 (당시 광케이블과 인터넷이 막 공급되던 시기였다). 많은 후기들이 1970년대 이후의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정보들을 담고 있었다. 한국에서 내가 공교육을 받을 때는 국사 교과서가 정부에 의해서 편찬되었다. 국사 교과서는 고조선부터 1950년까지는 ‘굳이 이런 것까지 알아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자세한 내용을 다루었다. 그리고 1950년 이후의 역사는 무언가 부끄러운 것을 감추듯 3-4 쪽으로 황급히 마무리되었다. 그래서 [박하사탕] 영화 후기들은 금기시된 무언가를 들여보는 듯한 관음증적인 쾌감을 가져다 주었다. 당시 인터넷에서 읽은 10여 개의 후기들과 급하게 쌓은 한국 근현대사 지식을 엮어 뿌듯하게 감상문을 써서 제출했던 기억이 난다. 부서 담당 선생님은 내가 이글을 썼을 리가 없다며 ‘표절‘ 판정을 내렸다. 당시 몇 개 문장을 따옴표 없이 가져다 쓰긴 했다.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그전까지 아무도 타인의 지적 생산물을 어떻게 정당하게 인용할 수 있는지 가르쳐주지 않았다.
미국에서 정신과 수련이 끝났을 때 즈음 [박하사탕]을 다시 접했다. 세 번째 시청이었다. 그 이전까지 느끼지 못한 강한 감정이 올라왔다. 그건 극도의 슬픔과 안쓰러움이었다. 영화를 두번째 시청했을 때까지만 해도 [박하사탕]은 주인공 영호의 개인적 비극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영화는 근현대사가 한국 모든 가족에게, 그리고 개인에게 입힌 광범위한 상처를 잘 보여주고 있었다. 대한민국은 이러한 큰 시대적 비극을 충분히 애도할 수 있었던 것일까.
영호의 삶을 시간 순으로 따라가며 (영화에서는 시간 역순으로 보여줌) 한국 근현대사가 그 시대의 가족들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혹시 영화를 아직 보지 않은 분이 있다면, 다음 부분은 영화를 시청한 뒤 다시 돌아와서 읽어주었으면 한다. [박하사탕]을 처음 시청할 때 느낄 수 있는 깊은 감동을 이 글이 방해하지 않았으면 한다.
영호는 1979년 한 철로 아래 강변으로 떠난 소풍에서 순임(문소리 분)을 만난다. 영호는 이름 없는 들꽃을 사진으로 담고 싶어하는 순박한 청년이었다. 순임은 박하사탕을 하루에 천개씩 포장해야 하는 공장의 근로자였다. 그들은 서로를 좋아했다.
영호는 다음 해인 1980년에 군 입대를 한다. 군은 계엄령의 통제를 받고 있었다. 부대까지 영호를 보러 찾아온 순임은 계엄령으로 인해 영호를 면회하지 못했다. 긴급 출동 명령에 허겁지겁 영호는 군장을 쌌다. 순임이 보내줘서 아껴서 보관하고 있던 박하사탕이 생활관 바닥에 쏟아졌다. 허둥지둥 어찌할 바를 모르는 이병 영호에게 지휘관은 발길질과 호통을 퍼붓는다. 목적지도 모른채 부대를 나서는 군 이송 트럭에서 귀가 중인 순임을 발견한다. 그녀의 이름을 불러보기도 전에 순임은 영호에게서 멀어져 갔다. 트럭에서 내려 순임에게 달려가고 싶었지만 영호는 군인이기에 그럴 수 없었다. 사랑하는 이의 이름 대신 영호는 군가를 불러야 했다.
영호가 트럭에서 내린 곳은 전라도 광주였다. 앞으로 달려가는 부대원을 따라 총을 들고 달려가지만, 그는 임무가 무엇인지 혼란스럽기만 했다. 영호는 어느 순간부터 다리를 절기 시작했다. 어디에서 날아들었는지 모를 총알에 다리를 맞았던 것이다.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는 영호는 철길 옆에 앉은 채 지원을 기다린다. 그러던 중 군인들을 피해 집으로 돌아가던 여학생 한명과 조우한다. 그 여학생의 모습에서 영호는 순간 순임을 보았다
여학생은 그 자리에 앉아 흐느끼며 집으로 보내달라고 영호에게 간청한다. 영호는 학생을 지켜주고 싶었다. 그 때 자신과 여학생 쪽으로 뛰어오는 군인들의 인기척을 듣는다. 영호는 여학생에게 빨리 도망가라고 소리치면서 실수로 격발을 했다. 영호는 자신의 총성이 멈추었을 때 주검이 된 여학생을 안으며 오열한다. 영호는 5.18 민주화 운동이라는 역사적 사건에서 (총을 맞은) 피해자이면서 (총을 쏜) 가해자였다. 그는 시민에게 총구를 향하도록 지시 받았던, 시대적 폭력의 피해자였다. 동시에 자신이 휘둘렀던 폭력이 내면에 남긴 죄책감을 안고 살아가야 했다.
신군부가 권력을 잡은 1984년 영호는 경찰이 된다. 그는 제대 후 순임을 찾아가지 않았다. 광주에서 살인자가 되어버린 영호는 과거 순수하게 순임을 사랑했던 자신을 같은 사람으로 볼 수 없엇다. 5.18 민주화 운동 전의 영호와 후의 영호는 화해할 수 없었다. 통합이 되기엔 그 둘의 모습은 너무나도 달랐다. 외상적 사건으로 인해 영호는 해리와 감정의 고립(앞 장에서 이에 대해 더 자세히 다뤘음)을 경험하게 된다. 순임은 영호의 고향을 수소문해서 그가 일하는 경찰서로 찾아온다.
순임은 영호가 완전히 다른 사람 같이 느껴지지만, 그의 손은 예전과 똑같아 보인다고 말했다. 순임은 순박하게 생긴 영호의 손을 보는 순간 그가 “나쁜 사람일 수 없겠다”고 믿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영호에게 카메라를 선물한다. 순임은 그가 들꽃을 찍고 싶다고 말했던 것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영호는 자신의 두 손을 바라보며 이해할 수 없는 미소를 짓는다. 그는 손으로 광주에서 살인을 저질렀고, 경찰이 되서는 민주화 운동을 하는 젊은이들을 고문하고 있었다. 영호에게 자신 안의 ‘순수하고 맑은’ 영혼을 인정하고 바라보는 것은 혼란만 키웠다. 순수한 영혼을 가진 고문관이 되는 것 보단, 일관적으로 포악한 고문관이 되는 것이 마음이 편했다.
순임을 자신 곁에 둔다는 것은 공존할 수 없는 가치들과 지속적인 곡예를 펼쳐야 함을 뜻했다. 영호는 순임이 보는 앞에서 그녀가 순수하다고 믿는 손을 식당 종업원인 홍자의 치마 속으로 가져간다. 순임은 그 모습을 보며 눈물을 흘리며 떠난다. 영호는 카메라를 돌려준다. 그리고 순임이 떠난 자리엔 폭력이 영호를 완전히 삼켰다. 홍자가 일하는 식당에 가서 즐겁게 회식하는 무리를 향해 군대에서 사용하던 구호를 외치며 몽둥이를 휘두른다. 홍자는 이날 내적 고통을 폭력의 형태로 풀어낼 수 밖에 없는 영호를 보았다. 홍자는 그런 영호를 위로하고 싶어 자신의 몸을 맡긴다. 서로를 향한 존중과 사랑이 부재한 잠자리였다. 하지만 홍자는 영호가 가진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주는 구원자가 되고 싶었다.
영호는 홍자와 결혼을 했다. 1987년, 영호는 임신한 홍자에게 순길도 주지 않고 신문만 쳐다보며 밥을 먹는다. 홍자가 신문을 빼앗아 들자, 영호는 “맞는다?” 라며 그녀를 위협한다. 폭력은 영호의 삶 안으로, 가족으로 까지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영호는 동료 형사들과 미란다 원칙 고지 없이 사람들을 잡아 들였고, 능숙하게 물고문을 진행했다. 회식 때에는 접대부를 끼고 술에 취해 노래를 불렀다. 돈을 지불해서 일시적으로 종속시킨 대상에게는 홍자 앞에서 띠지 않던 미소를 보냈다.
공격자와 동일시 (Identifying with aggressor)를 통해 영호는 자신의 연약함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깊게 묻어놓은 따뜻함과 순수함이 예상치 못할 때 모습을 들어냈다. 술집에서 미성년 접대부에게 절대 그곳에 나타나지 말라며 호통치는 모습. 수차례 물고문 후 자백후 수치심에 떠는 명식을 토닥이는 모습. 그리고 순임을 그리워하며 흐느낄 때. 이럴때면 영호는 자신이 대체 무얼 하고 있는지 혼란스러웠다. 자신이 실제로 느끼고 있어야 할 감정들과 다시 닿을 때면 영호는 다리를 절기 시작했다. 인간적, 순수한 감정들이 느껴질 때면, 몸이 슬픈 역사 앞의 연약한 피해자였던 영호를 기억하고 끄집어 냈다.
(나머지 내용은 오프라인 서적으로 곧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