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집에서 살다 죽고 싶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코로나 시기를 거치면서 우리는 뉴스를 통해서 본의 아니게 요양병원이나 요양원 같은 곳에 수용되어 돌봄을 당하고 있는 노인들의 소식을 알게 되었다.
그 누구도 그런식의 돌봄을 원하진 않았겠지만, 준비되지 않은 공간은 결국 사람을 수용소에 있는 것 처럼 만든다.
나는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가 그래도 참 복 있는 분들이라 생각하는 게 코로나 이전에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지인의 어머니는 혼자 살고 계셨는데 하필 코로나가 한창일 때 욕조에서 나오다가 그만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크게 다치셨다.
우리 할아버지의 사례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너무 안타까웠던 것은 다쳤다는 소식을 자녀들에게 알린 이후로 돌아가시기 직전, 그리고 장례까지도 자녀들의 돌봄을 받거나 심지어 손을 잡고 인사를 나누는 모든 행위가 금지되었다는 것이다.
그분은 방호복을 입은 119 구급대원들에 의해서 응급실로 옮겨졌고 역시 철저하게 격리된 상태에서 고관절 수술을 받으셨다고 한다.
수술 후에는 다행히 재활이 잘 되어 걸을 수는 있게 되었지만 병원은 면회가 전면 금지되었기 때문에 유리벽 너머로만 자식들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 할아버지처럼 섬망부터 시작된 인지장애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그래서 치매전문병원으로 옮기신 이후부터는 자식들이 자기를 고려장 했다는 오해를 하면서 괴로움과 원망 속에 지내시다가 돌아가셨다.
그 일은 그 지인과 가족들에게 두고두고 한이 되었는데 모두가 그랬던 것처럼 장례식조차 코로나로 제대로 치르지 못해서 더 크게 상심했다.
당시에 가족들은 코로나가 감염되지도 않았고 어머니도 백신을 맞고 코로나가 한번 걸리긴 했으나 잘 회복이 되었기 때문에 집으로 모셔가고 싶어 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의료기관에서 입원을 계속 권했고 역시나 돌봄에 자신이 없고 정보가 없었던 그들은 결국 어머니를 방치 아닌 방치로 돌아가시게 했다는 죄책감으로 평생을 살아가게 된 것이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너무나 안타까웠다.
집,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은 사람을 살리기도, 죽이기도 한다는 걸 너무나 잘 알기에 그렇다.
가끔은 집이 내 기분을 결정한다는 생각을 한다.
정리되지 않은 물건, 어수선한 조명, 무겁게 내려앉은 커튼 하나에도 마음은 쉽게 눌린다.
고장 난 스위치 하나로 괜히 우울해지는 것 같기도 하다.
반대로 새벽산책을 마치고 현관을 들어서는 순간 햇빛이 들어오는 거실을 바라보면
그 광경을 보는 자체로 마음이 안정되고 포근해진다.
가끔 기분전환을 위해서 방향을 바꾸거나 식탁 위의 의자를 다른 각도로 돌려놓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달라진다.
그럴 때면 문득,
‘공간이 사람을 만든다’는 말을 실감한다.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공간은 더 중요하다.
나는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집을 떠올린다.
가족 모두가 사랑했던 공간이었지만, 그곳에는 어르신들이 살기에는 늘 위험이 숨어 있었다.
어지러운 벽지들과 화장실의 미끄러운 바닥, 거실과 욕실 바닥의 높이차이. 무겁게 닫히는 방문, 어둑한 조명.
할머니가 살림을 살기에도 좋은 구조가 아니었다.
세탁기를 돌리고 무거운 세탁물바구니를 들고 마당으로 나가야 하는 동선은 이미 신체피로도를 높이는 주요 원인이었다.
평생 편마비로 걸음이 불편한 할아버지는 대문에서부터 이어지는 가파른 계단을 15단 오르고 집에 들어가기 위해 현관문 앞에 있는 계단도 3칸이나 올라야 했다.
현관에서 신을 벗으면 또 한 칸 올라가야 했다.
몸을 의지할 곳은 없어서 그냥 신발장 모서리를 짚거나 벽을 붙들고 다녔다.
돌아가시고 나니 할머니 할아버지 손때 묻은 벽지가 반들반들했다.
거기에 안전손잡이 하나만 달려 있었어도 두 분의 삶은 훨씬 편했을 것이다.
자식들이 무지한 탓에, 관심이 없었던 탓에 그 안에서 두 분은 평생을 살아오셨다.
그렇다고 그들을 탓할 수는 없다.
그게 잘못되었다는 걸, 더 나은 환경을 만들 수도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정말 몰랐다.
누군가에게는 그냥 오래된 집이지만,
나에게는 ‘조심스럽게 늙어가는 법’을 가르쳐준 공간이었다.
돌봄이란 결국,
누군가를 간호하는 행위가 아니라 스스로 지낼 수 있도록 환경을 준비하는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누군가의 손을 잡기 전에 먼저 바꿔야 하는 것은 그 사람이 머무는 공간이었다.
무심코 지나쳤던 문턱 하나, 조명 스위치의 높이, 욕실 바닥의 미끄러움 같은 것들 말이다.
이런 것들을 할머니 할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 발견했더라면 조금은 달라졌을 텐데.. 하는 생각들을 하면서
나는 요즘 스스로에게 자주 묻는다.
‘이 집은 내 마음을 지켜주고 있나?’
외로울 때 앉아 있을 자리, 피곤할 때 기대 쉴 벽,
힘들 때 불을 켜줄 스위치가 있는가?
내가 사는데 불편한 건 없나?
좀 더 나이 들어도 지금 이 집에서 사는 건 괜찮을까?
공간은 단순히 벽과 가구로 채워진 구조물이 아니다.
공간은 마음의 형태를 닮아 있다.
불안한 사람은 문을 자주 닫고,
자신감 있는 사람은 커튼을 활짝 연다.
우리가 사는 방식이 공간을 만들고,
그 공간은 다시 우리를 만든다.
그래서 나는 ‘공간심리디자인’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보기 좋은 집이 아니라,
마음이 편해지는 집을 만드는 일.
화려한 인테리어보다 중요한 것은
그 집에서 사는 사람이 ‘나답게’ 숨 쉴 수 있느냐의 문제다.
공간을 바꾸면 마음이 달라진다.
마음이 달라지면 관계가 달라지고,
관계가 달라지면 삶 전체의 리듬이 달라진다.
효테리어는 결국 마음의 회복을 위한 구조적 디자인이다.
스스로 일어날 수 있도록 누군가의 존엄을 지켜주는 작은 안전 손잡이,
원하는 때에 끄고 켤 수 있도록 낮게 설치된 스위치,
넘어지지 않게 바닥에 붙인 미끄럼 방지 패드 하나.
집 안의 그 모든 작은 구조들이 마음의 안정을 만든다.
공간심리디자인이라는게 실제 있는 개념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람을 바꾸지 않고 사람의 감정과 생활, 신체변화등을 담아 구조를 재설계한다면 그게 바로 제일 좋은 공간이 아닐까?
공간이 달라지면 마음이 달라지고 마음이 달라지면 삶의 태도가 달라지니 말이다.
나는 오늘도 그런 시선으로 집을 바라본다.
내 부모님의 집, 그리고 언젠가 늙어갈 나의 집.
그곳이 불편하지 않도록,
그곳이 따뜻한 마음을 잃지 않도록,
조금씩 고쳐가고 있다.
그저 관찰하면 된다.
불편한 걸 찾아서 고쳐주면 된다.
공간은 결국 마음에서 나오니까.
어쩌면 나는 공간이 아니라 마음을 디자인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오늘도, 내 집에서 끝까지 살고 싶은 마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