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던 곳에서 살아가기와 근거리 돌봄의 기술.

가장 편안한 공간, 어떻게 안전하게 바꾸어 오래도록 살아갈까

by 조와와왈

내 마음 한구석에는 누구도 강요하지 않은 책임감이 자리 잡고 있다.

그건, 맏이의 맏이로 태어나서 할머니에게 세뇌당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할머니는 늘 내게 그랬다.

"네가 잘 되어야 사촌들에게 본보기가 되고 네가 삼촌 숙모들도 나중에 잘 돌볼 수 있다" 이렇게 말이다.


잠시 TMI를 하자면 그래서 나는 결혼할 상대를 집에 소개하는 게 어려웠다.

내가 세운 기준이 까다로웠고 소개해야 할 식구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내가 아직도 미혼이라고 하면 너무 우스운 평계리나?

그래도 나는 혼자서 항상 생각했다.

우리 아빠가 5형제이니 그들의 배우자까지 하면 총 10명이 내가 앞으로 돌보아야 할 노인들이구나.

그래서 나는 요즘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노인주간 돌봄 센터나 재가요양센터 같은 걸 그냥 가볍게 볼 수만은 없었다.

언젠가는 내가 할머니집터에 건물을 새로 지어 올려서 10명의 노인들과 함께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나는 맏이의 맏이인 덕분에 할머니 할아버지 사랑은 물론 삼촌들의 사랑도 독차지했다.

이건 편애였고 특혜였다.

아마 그걸 나도 알았기 때문에 어쩌면 나는 그래야 한다고,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죽음을 경험한 뒤, 나는 ‘집’이라는 공간을 완전히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

그전에는 그저 휴식의 공간, 개인의 사적인 장소로써의 집이었다면,

내가 지금 생각하는 집은 하나의 ‘돌봄의 플랫폼’이다.

누군가의 일상과 건강, 심리와 존엄이 가장 오랫동안 머무는 무대이기 때문이다.

어르신 천만 시대. 우리나라는 이미 초고령사회에 진입했고 세계 다른 나라도 시기의 문제일 뿐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나는 ‘돌봄’이라는 단어를 다시 정의하고 싶었다.

돌봄은 병원이나 요양시설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진짜 돌봄은 내가 살던 곳에서 나답게 살아가는 것,

그리고 그것을 지속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환경과 관계의 구조를 설계하는 일이다.


Aging in Place, 그리고 “내 집에서 끝까지”


사회복지, 특히 주거복지나 노인복지 쪽 일을 하거나 공부해 본 사람들에게는 요 근래 몇 년간 아주 중요한 정책방향으로 제시되고 있는 ‘Aging in Place’라는 개념을 들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익숙한 자신의 공간에서 나이 들어가는 삶,

즉 요양시설로 옮겨가지 않고 자신의 집에서 가능한 오래, 안전하고 존엄하게 살아가는 방식을 말한다.

이는 단순한 복지 개념이 아니라 삶의 질을 결정하는 철학이기도 하다.


코로나 시기를 지나며 우리는 너무 많은 ‘수용된 노인들’을 보았다.

의료적으로는 안전했을지 몰라도, 정서적으로는 고립된 돌봄이었다.

물론 장점도 많지만 단점도 많다.

존엄이 무너지고 자기 결정권 같은 건 아예 고려되지 않는...


그에 비해 집에서의 돌봄, 곧 재가 돌봄(Home Care) 은 훨씬 인간적이다.

나는 누군가가 돌봐줘야 하는 재가 돌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혼자서도 스스로를 돌볼 수 있는 것이 우선되는 삶 말이다.

나는 그게 가능해지기 위해서 가장 큰 문제가 바로 환경의 조건이라고 생각했다.


집은 나이 들수록 ‘살기 좋은 공간’이 아니라 ‘살기 어려운 공간’으로 변한다.

문턱, 조명, 욕실, 침실, 부엌 — 이 모든 것이 점점 장애물이 된다.


게다가 살면서 모아 온 짐들이 집안에서의 활동성을 떨어뜨리는 원인이 되거나

혹은 안전사고를 일으키거나 쾌적함과 거리가 먼 불필요한 짐들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래서 노년의 공간은 새로 짓는 것이 아니라 다시 짜야한다.


즉, 이제는 유니버설디자인을 주거의 영역까지 끌고 들어와야 한다고 본다.


그렇다면 늙어가는 우리 부모님의 집, 어떻게 리디자인할 것인가


나는 부모님이 사는 집을 자주 관찰한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살던 집을 떠올리기도 한다.

그 집에서 할머니 할아버지가 어떤 방식으로 지냈었는지, 사소한 생활습관이나 움직임들을 떠올리려 애쓴다.

그러면서 지금 우리 부모님의 생활과 비교해보기도 하면서 어떻게 하면 최대한 안전하게 그리고 쾌적하고 편안하게 지내실 수 있을까 고민한다.


요즘 두 분은 은퇴 후 제2의 인생을 즐기고 계시지만,

그 집은 여전히 ‘젊을 때의 기준’으로 지어진 구조다.

동생이 결혼을 해서 출가외인이 되고 나도 독립하면서 두 분만 살고 있지만 아직도 4인기준의 살림이 대부분이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다.

내가 부모님 댁을 좀 바꿔드리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은근히 말씀을 드려보면 두 분 모두

아직 노인이라는 자각, 신체가 늙어서 다칠 수 있다는 생각이 없기 때문에 뭔가 생활공간의 변화를 준다는 것에 부정적인 반응이다.

실제로 그렇다.

아직은 젊다고 느끼고 내가 생각해도 건강하게 생활하시니 말이다.


욕실의 바닥은 미끄럽고, 싱크대는 허리를 숙여야 한다.

그래서 나는 부모님의 집을 ‘미리 고치는 효테리어’ 관점으로 본다.

차도 예방정비가 중요하고 건강도 아프기 전에 예방하는 게 좋다는 거 우리 모두가 알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집에서 넘어지기 전에, 늙어서도 혼자 살아갈 수 있게 인테리어도 예방적 차원으로 생각해 보면 어떨까?


사실, 뭐 거창한 공사도 필요 없다.

몇 가지 원칙만 지켜도 삶의 질이 달라진다.


1. 어두운 곳은 밝게


할아버지 집에 가면 늘 어두컴컴했다.

눈이 부셔서 그런 줄 알았더니 전기를 아끼느라 그렇단다.

근검절약이 미덕인 시대를 살아오신 분들이니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어두워서 가구에 부딪히고 잘 안 보여서 설거지가 제대로 안될 때도 있다.

어두운 곳은 밝게, 눈에 잘 띄게 해두어야 한다.

더구나, 어두운 곳은 마음도 어두워진다.

낮에는 커튼을 열고 최대한 자연광으로 공간을 밝게 하고 저녁에는 환하게 공간을 밝힐 필요가 있다.

눈이 부시다면 간접조명으로, 전등 색도 쨍한 하얀색보다는 은은한 색으로 조정할 수 있다.

그리고 밤 중에 일어나서 화장실을 가는 일이 많아지는 시기가 온다면 침대 발아래에 센서등을 두어 활용하면 안전하다.



2. 문턱을 없애거나 낮추기


내가 기업 IR이나 강의를 마무리하면서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오늘 넘었던 문턱을 내일은 못 넘을 수도 있습니다. 그게 바로 노화니까요."

정말이다. 1~3cm 문턱도 고령자에게는 넘어짐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물론 요즘은 실내에 거의 문턱이 없다. 하지만 아직도 여전히 많은 집에 문턱이 존재한다.

나이가 들수록 걸을 때 발을 들어 올리는 높이가 낮아지고 발은 자꾸 자주 걸린다.


구조적으로 방문을 없애는 것이 어렵다면 방문턱 경사로 같은 것들을 쉽게 구할 수 있으니 대안이 될 수 있다.

발전하는 로봇 가전들을 위해서도, 그리고 혹시라도 나중에 휠체어, 보행보조기를 실내에서 써야 할 때를 위해서라도 문턱은 없애는 것이 좋다.

도저히 턱을 없애는 게 불가능 한 곳이 있다면 넘나들 때 잡을 수 있는 안전손잡이를 벽면에 설치하면 된다.



이런 변화는 큰돈이 들지 않지만, 돌봄의 시간을 몇 년이나 늦춰줄 수도 있다.

이 두 가지는 낙상을 예방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다.


우리 할아버지 사례처럼 넘어짐->수술->재활불가->병원생활->돌아가심 을 경험한 가정은 수도 없이 많다.

어른들이 낙상을 제일 무서워하는 것도 바로 이런 수순이 어쩌면 죽음으로 가는 첫 단계이기 때문일 것이다.

부모님이 다치지 않는다는 건 단순히 ‘사고 예방’의 문제가 아니라,

그분들의 자존감과 독립성을 지켜주는 일이다.


근거리 돌봄, 마음의 거리 설계하기


사실 나는 이 ‘집수리’라는 건 형편에 따라서 하면 좋지만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하긴 한다.

이미 익숙해져 버린 공간 안에서 안전을 지킬 수 있으면 되니까.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바로 거리 설계라고 생각한다.


Aging in Place가 물리적 공간의 문제라면,

근거리 돌봄(Community Care) 은 관계의 문제다.


내가 수도권, 제주도 등지에서 사회생활을 하다가 할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부산으로 다시 돌아온 가장 큰 이유는 심리적 안정 때문이었다.


내 부모님과 가족들이 사는 곳.

내 동생가족이 있는 곳.

내가 가장 편하게 생각하는 친구들과 지인들이 있는 곳.


우리 엄마는 요즘 새벽배송에 진심이다.

마켓*리나로*프레시를 말하는 게 아니다.

반찬이 맛있게 되었거나 나눠 먹고 싶은 과일 같은 게 있다거나

대형마트에서 대량구매한 공산품 같은 걸 딸들 집에 나눠주는 걸 말한다.

새벽기도를 마치고 나면 우리 집과 동생집을 차례로 돌면서 문고리 배송을 하는 것이다.


엄마집과 우리 집 동생집은 각각 차로 10분 이내 거리에 있다.

아파트 단지가 많이 모여 있는 계획도시 안에 각각 다른 아파트에서 살면서 서로가 서로를 돌본다.

누가 아프면 가서 약을 챙겨 주고

동생이 급히 육아도움이 필요하면 도와주기도 하고

때로는 요리를 많이 해서 같이 식사를 하기도 한다.



이처럼 가까운 거리에 사는 나와 동생이

엄마가 필요할 때 곧장 달려갈 수 있고,

부모님은 ‘언제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느낀다.

이건 혼자 사는 나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그 거리가 너무 가깝거나, 심리적으로 얽혀 있으면 돌봄은 ‘의무’가 되고 서로를 소진시킨다.

그래서 나는 ‘적당한 거리의 사랑’이 가장 오래간다고 믿는다.

그리고 지금 그 연습을 하고 있는 중이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근거리 돌봄의 구조는 이렇다.


물리적 거리: 차로 10~20분 이내 → 응급 시 즉시 방문이 가능하고, 동시에 일상의 간섭은 최소화되는 거리.


심리적 거리: ‘부탁할 수 있지만 강요하지 않는 관계’ → 일주일 한두 번의 방문, 매일 연락하지 않아도 안심할 수 있는 신뢰, 안될 때는 거절할 수 있는 관계.


기술적 거리: IoT 센서, 스마트워치, APP 등을 활용해 부모의 안전을 확인하되 ‘감시’가 아닌 ‘연결’로 인식되게 하는 것.

나는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한동안 엄마아빠 방에 밤중에 들어가 보곤 했다.

살아있는지 확인을 하기 위해서이다.

가끔 부모님이 연락이 안 되면 불안하기도 하다.

그래서 최소한의 장치로 아이폰 피트니스앱에서 스마트워치를 통해 쌓이는 활동정보를 연동시켜 두었다.

서로 운동을 독려할 수도 있고 연락을 안 한 날에도 아, 오늘 엄마가 아침운동을 했구나, 뭐 그런 정도는 확인이 되니 영 안심이 되니까.



부모님 세대에게는 ‘의존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이 가장 큰 위로라고 한다.

부모님들도 자녀와 함께 살며 돌봄을 받는 관계보다는 따로 살되 가까이 살면서 정서적 지원을 받는 게 더 좋다는 고령자 통계도 있다.


대신 자녀 세대에게는 ‘너무 늦지 않게 도울 수 있다’는 말이 가장 큰 안도다.

이 두 감정을 잇는 다리가 바로 근거리 돌봄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부모님 댁에 갈 때마다 집을 점검하듯 본다.

“엄마, 이거 위험하니까 바꿔요.” 같은 강요가 아니라

“이건 내가 보니까 이렇게 하면 더 편하겠다.”라고 말하는 태도.

엄마도 아빠도 자연스럽게 그래, 이제 그런 걸 해둬야지, 천천히 받아들일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니까 말이다.


그게 돌봄의 기술이 아닐까?

공간을 고치면서 마음의 빈틈도 채워가는 일.

돌봄은 결국 자립을 돕는 사랑의 형태다.

도움을 주면서도 상대의 자유를 지켜주는 일,

우리 부모가 우리를 위해 평생 해왔던 것.

되돌려드리는 것 그게 진짜 효라면 좋을 텐데 말이다.


가깝게 있으면서도 얽매이지 않고,

필요할 때는 손을 내밀고,

그 외의 시간에는 각자의 삶을 존중하는 것.


이것이 내가 말하는 근거리 돌봄의 기술이다.

그리고 이 철학은 내가 만든 단어, ‘효테리어’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돌봄의 거리를 잘 설계한다면 서로 지치지 않게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너무 이상적인 발상일 수 있지만 그것이 내가 꿈꾸는 세대 간의 새로운 풍경, 내 집에서 끝까지의 진짜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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