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내 집에서 끝까지

누구나, 자기 집에서 늙어갈 수 있는 사회를 위하여.

by 조와와왈

나는 늘 그날을 떠올린다.

119 구급대의 들것에 실려 집을 떠난 할아버지의 뒷모습,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던 그 집.


할아버지가 그렇게 집을 떠난 이후 벌어진 가족 안의 보이지 않는 갈등과 불화.

그때부터였다.

‘내 집에서 끝까지’라는 말이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건.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낳고, 사랑하고, 늙어간 공간에서 삶을 마무리하길 바란다.

그건 인간이 지닌 가장 본능적인 존엄의 표현이다.


창업을 하고 처음 기업 IR을 하러 다닐 때 나는 프레젠테이션을 늘 이렇게 시작했다.

"어디서 죽고 싶으세요?"

당돌했다.

그런데 나는 절박했다.

적어도 내 눈으로 본 죽음은 갑작스럽긴 했어도 집에서 심근경색으로 돌아가신 할머니의 죽음이 요양병원에서 자기 결정권을 모두 빼앗긴 채 낯선 곳에서 마지막을 맞아야만 했던 할아버지의 죽음보다 훨씬 괜찮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 질문 뒤에 항상 이렇게 자문자답했다.

"저는 제가 가장 익숙한 공간인 제 집의 방, 제 침대에서 가능하다면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제 마지막을 지켜봐 주는 가운데서 편안하게 죽고 싶습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더라도, 그 도움 속에서 여전히 ‘나답게’ 숨 쉬고 싶다는 욕망.

아니, 누군가의 도움 없이도 오랫동안 혼자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을 만들겠다는 욕망.

그게 내가 이 일을 시작한 이유이자, 지금도 효테리어를 연구하는 이유다.



1. 돌봄 이후의 세대가 묻는다


요즘은 ‘돌봄’이라는 단어가 너무 쉽게 쓰인다.

노노케어, 영케어러, 돌봄 노동자.등

하지만 진짜 문제는 돌보는 일보다 돌봄을 전제로 한 사회의 구조에 있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누군가가 돌봐줘야 하는 노인’을 전제로 시스템을 설계한다.

요양병원, 장기요양보험, 노인복지관, 간병 서비스.

이 모든 제도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으로 노인을 규정한다.


돌봄은 심각한 사회문제라고 한다.

돌봄 인력이 없어서, 돌봄 노동자의 처우개선이 필요해서, 돌봄에 너무 많은 사회적 비용이 들어서..

그래서 대안이 있나?

저출산에 세금 낼 사람은 줄어들고 돌봐야 할 노인은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세상은 달라지고 있다.

자녀 세대는 부모를 돌볼 여유가 없고, 부모 세대는 자녀에게 짐이 되기 싫다.

아니, 부모와 자녀라는 관계로 이어진 사람들이 점점 없어지기도 한다.

사회는 점점 개인화되고 홀로 지내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1인 가구, 독거노인이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게 된 지금,

돌봄은 더 이상 가족의 문제도, 개인의 문제도 아니다.

이건 사회 전체의 고민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지금 고민해야 할 것은 ‘누가 돌볼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돌봄이 필요 없는 사회를 만들 것인가’다.

그 해답은 생각보다 멀리 있지 않다.

그건 바로 ‘집, 공간’에서 시작된다.




2. 집은 가장 오래된 복지다


내가 효테리어를 하며 깨달은 건 단순했다.

좋은 집은 좋은 복지보다 강력하다.

안전한 공간, 따뜻한 조명, 편리한 구조는

약보다, 간병보다, 상담보다 사람을 오래 살게 한다.


그런데 사실, 좋은 집이라는 건 역세권 신축아파트가 아니라도 상관없다.

한 평짜리 겨우 몸 하나 누일 공간이지만 병원이 아니라서, 요양원이 아니라서 좋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이제 와서야 겨우 시니어레지던스, 시니어주택들을 짓겠다고 한다.

그런데 잘 살펴보면 특이한 게 있다.

뭔가 제공한다는 거다.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고

식사를 제공하고

커뮤니티시설을 제공하고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모두 비용이 들어가는 문제다.


과연 노인의 삶을 제대로 알고 설계되는 것일까?


그래서 나는 늘 말한다.

“노인의 집은 자립이 가능한 공간이어야 한다.”


노후의 공간은 단순히 물리적 안전을 담보하는 장소가 아니다.

누군가가 뭘 해주고 일방적으로 돌보아줘야 하는 장소는 더더욱 아니다.


자립해서 살 수 있는 집은 자존감의 기반이고, 삶의 마지막 공간이 되기 가장 좋은 곳이다.

그 집을 잃는 순간, 사람은 자신을 잃는다.

돌봄이 필요한 사람보다, 돌봄이 불가능해진 집이 먼저 무너지는 이유다.




3. 효테리어, 존엄을 설계하는 사회적 언어


효테리어는 더 이상 나 혼자만의 창업 아이템이 아니다.

이제는 세대 전체, 산업 전체가 함께 고민해야 할 사회적 언어가 되었다.


국가가 고령사회를 대비한다는 것은 단순히 노인을 수용해서 돌볼 수 있는 요양시설을 늘리는 일이 아니다.

다행히 살던 곳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도록 사회 전반의 시스템을 갖추는 정책들이 시행되고 있으니 너무나 반가운 일이다.


우리는 이제 스스로를 위해서 집 안의 문턱을 낮추고, 조명을 바꾸고, 안전손잡이를 다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예쁜 디자인 비싼 자재, 더 멋진 가구, 기능이 많은 가전으로 집을 채우거나 오직 재산 가치로서의 부동산으로만 집을 바라보지 말아야 한다.

작은 관심에서 시작하는 구조가 사람의 존엄을 지키고,

그 존엄이 사회의 품격을 만든다.


‘노인을 위한 집’은 특별한 집이 아니다.

그건 ‘모두를 위한 집’이다.

아이도, 장애인도, 임산부도, 잠시 몸이 불편한 사람도

불편하지 않게 살아갈 수 있는 환경.

그게 유니버설 디자인이며, 내가 말하는 효테리어의 철학이다.


나는 종종 강의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 집은 나한테 제일 편안하면 됩니다”


벽의 손잡이 하나로, 밝은 조명 하나로, 내가 지내기에 불편하지 않게 바꿔가는 일 그게 바로 삶의 품위를 보장하는 일이고 부모님을 위해서 그걸 준비하는 게 현대판 진짜 효다.




4. 돌봄 이후의 세대를 위하여


나는 돌봄의 시대는 끝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완전히 끝내지는 못하겠지만 비율을 서서히 줄여야 한다고 본다.

이미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의존하며 산다.


이제는 ‘자립의 시대’다.

돌봄을 받는 대신, 돌봄을 준비하는 세대.

우리는 부모세대보다 더 오래 살고, 가난하게 살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전세대보다 더 나답게 늙어가고 싶어 한다.

기술을 활용하고, 사람들과 더불어서 말이다.


이건 더 이상 개인이 그냥 단순하게 원하는 정도의 감정문제가 아니다.

국가와 사회가 설계해야 할 구조의 문제다.

아파트의 평면 하나, 욕실의 높이 하나, 도시의 보행로 하나까지도

모두 ‘돌봄 이후의 세대’를 기준으로 다시 설계해야 하지 않을까?

모두를 위한 디자인으로 말이다.



5. 나의 집, 우리의 사회


할머니집은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사셨던 불편했던 그 공간 그대로이다.

크게 변한 건 없다.


그 공간에서 우리 부모님과 삼촌숙모들은 여전히 가족모임을 하고, 또 그사이 사촌들이 결혼해서 낳은 조카들도 뛰어논다.

더 늦지 않게 그 집은 더 나이 든 내 부모 세대에 맞게 내가 고쳐둘 것이다.

추억과 사랑은 간직하되 불편은 없어지게.

나는 여전히 그 집을 통해 나의 초심을 돌아본다.

내가 왜 이 길을 선택했는지,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해 낸다.

노후의 주거를 설계하는 일은 결국 나를 위한 일이다.

나는 자립이 가능한 환경을 만드는 것이 그 첫걸음이라고 생각했고 앞으로 이 사회는 그 일이 가능해지게끔 변화할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여전히 ‘내 집에서 끝까지’라는 말을 확신한다.

그건 혼자 늙어서 죽겠다는 선언이 아니라,

함께 오래 살기 위한 약속이다.

나의 집이 나를 지켜주고,

우리의 사회가 나의 집을 지켜주는 구조.

그게 진짜 자립이고, 진짜 복지다.


효테리어는 그 약속의 첫 문장이다.

누군가의 집을 고쳐주는 일,

그 집 안의 삶을 존중하는 일,

거기서 늙어 죽을 때까지의 삶을 지켜 주는 일,

그것이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나는 믿는다.


내 집에서 끝까지.

나 한 사람의 바람이 아니라 언젠가는 우리 모두가 함께 해결해 낼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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