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 속에서 뵈오며
요즘 와서는 더 자주 뵙는 듯하다. 다시 만나 뵈올 날이 점점 다가오고 있어서일까? 나이 탓인지도 모른다. 이미 돌아가신 부모님을 요즘 다시 자주 뵙는다는 말인데, 그것도 꿈에서가 아니라, 현시에 그렇다. 그렇다고, 내가 어찌 잘못된 것은 결코 아니다.
아침, 저녁으로 세수하거나 면도를 하러 화장실에 들어가서 거울을 보는 순간, 어떤 때는 내 얼굴에서 어머니의 모습이 언뜻 보인다. 또 어떤 날은 아버님이 보인다. 내 얼굴을 사진 찍어보면 영락없는 아버지의 모습일 때도 있다. 내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것은 아닌 것이, 집 사람이 나를 보노라면, 내 얼굴에서 우리 어머니가 보인단다. 특히 입과 그 언저리가 꼭 울 어머니를 빼닮았다며,,, 예전에 함께 살며 겪었던 시집살이의 그 옛날이야기가 또 자동적으로 연이어 꼬리를 문다.
며칠 전에는, 집에서 아버님께서 예전 모습으로 앉아 계신 것을 보고 혼자 놀란 적도 있었다. 늘 아버님께서 책상 앞에 앉아 책을 읽고 계셨었는데, 뒷모습을 보니, 영락없는 아버님이 앉아계신 것 아닌가? 그런데, 책 대신에, 컴퓨터 앞이다. 아들 녀석이 집에 와 있던 날, 아버님이 쓰셨던 방에서 똑같은 위치에, 똑같은 자세로 앉아있었는데, 내가 정말로 깜짝 놀랄 정도로 흡사했다. 뒤통수며, 귓 모양이며, 널찍한 등까지... 그뿐만 아니라...
딸아이를 보노라면, 울 어머니가 언뜻 보이고, 또 한국에 있는 누이동생들도 보인다. 핏줄이 무엇인지, 영락없는 같은 모습의 재현인 것 같다. 얼굴뿐만이 아니다. 목소리며, 성격까지도 같다. 그런 이야기가 집 사람 입에서도 자주 오르내리는 것을 보면, 나 혼자만의 착각은 아니다. 착각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말인데, 어떤 때는 아들 녀석을 내 남동생과 혼돈하는 착각이 들 때도 있다. 사실 우리 아버님도 예전에 삼촌과 나를 혼돈하셨던 적이 있었는데, 아버님이나 나는 치매하고는 거리가 멀다. 아들네미가 말하는 것을 듣고 있노라면, 마치 처남이 하는 듯한 말투다. 아마 어렸을 적에 한 집에서 지냈던 적이 있어서 그럴까? 지금은 모두들 멀리 떨어져 살고 있어서 자주는 직접 못 보는 동생들이지만 그렇게 거울로 비춰보듯 늘 보면서? 지내고 있다. 그런데...
집 사람을 보니, 우리 집안 식구의 얼굴은 어느 구석에도 없다. 당연하다. 대신에, 처갓집 식구들이 보인다. 처남과 처형의 얼굴이 보이고 또 돌아가신 장인 어르신의 얼굴이 보인다. 특히나, 집사람의 코 모양이 그렇게도 장인어른을 쏙 빼닮은 것을 보면 정말로 신기하다. 나는 한 번도 직접 뵌 적은 없지만, (그러나 그분은 우리가 사귈 무렵 멀리서 몰래 보셨다고 하는데...) 장모님은, 집사람과 처남의 얼굴에서 장인의 모습을 빼어보면서, 그 모습을 나 혼자 떠올려도 본다.
우리 할머니는 내가 어렸을 적에, 늘 내 뒤통수를 쓰다듬으시면서, 내 뒤통수가 할아버지를 그렇게도 빼닮았다며, 내 뒤통수를 통해 먼저 가신 할아버지를 떠오르시곤 하셨다. 그러면, 어머니는 뒤에서, 우수개소리로 '주무실 때, 할아버지는 늘 돌아 누우셨남?' 내가 한 번도 뵌 적이 없는 할아버지는, 아버님과 그리고 숙부님의 모습에서 할머니를 빼 본다. 나 혼자 해보는 덧셈과 뺄셈, 나눗셈을 해보며, 할아버지의 모습을 도출해 본다.
외형뿐만이 아니다. 성격 또한 닮았다. 아버지의 그 성격이, 아들에게서, 그리고 어머니의 성격이 딸아이한테서 발견될 때마다 신기하기도 해서 혼자 감탄하곤 한다. 그런데, 그 성격이 그대로 내려갔을까? 그건 아닐 것이다 그 연결 고리에 내가 있으니, 자식들의 성격 형성에는 분명 나를 매개체로 전수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성격이 고약하면, 그 고약한 성격이, 성격이 온순하면 그 온순함이 나를 거쳐서 내려갔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하루하루를 무의미하게 살아서는 안 될 것 같다. 하루를 행복하게, 감사하게, 아니면, 힘들게, 또는 분노로 보낸다면, 그 영향이 결국에는 자식의 성격을 만들어가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 아닐까? 그래서 나의 생활이 내 삶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결국에는 후손들에게로 이어지는 유전자로, DNA로 만들어져 가는 것 아니겠는가? 그래서 집안마다, 부족마다, 민족마다 성격이 다름도 다 이와 같이 형성되어 온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거울을 쳐다보며 해 본다. 내가 어느새 이렇게 늙었을꼬? 우리 아버님의 늙으신 모습을 오늘도 거울 속에서 뵙는다. 그래서,
집 사람은 내가 이쁜 짓을 해서 이쁘게 보이면, 우리 어머님과의 좋았던 일을 떠올리며, 이야기의 보따리를 풀고, 내가 밉상인 날은 우리 어머니의 섭섭했던 이야기의 보따리를 푼다. 그래서 이미 돌아가셨지만, 내게는 아직도 효도를 해야 할 거리가 남아 있는 셈이다. 즉 집사람에게 잘해주는 것이 효도와 직결된다는... 나 혼자 터득한 공식이다. 너무 늦었을까?
'나'라고 하는 존재는 부모, 조상, 그리고 친척들로부터 여기서 살점 조금, 저기서 살점 조금, 그렇게 얼기설기 끼워 맞춰서 그렇게 만들어진 작품에 불과한 것이다. 고로 잘난 척할 필요도 없다. 뛰어봤자 벼룩이다.
부모님은 지금도 저 세상에서 무엇을 원하고 계실까? 예전에 늘 하시던 말씀 중에는, '훗날 자식들에게 혹시라도 해가 될까 봐, 자식을 위해서, 손해를 보는 한이 있어도 남에겐 각박하게 할 수는 없다'라는 말씀을 하셨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후손들이 잘 되기를 원하셨으니, 이미 돌아가시고 안 계신 분들께 효도하는 방법이란, 결국 후손들이 잘 되는 것 밖에는 없지 않겠는가? 잘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돈 많이 버는 것? 무병장수? 아니면 행복하게 사는 것일까?
한국의 드라마에는 기독교적인 시각은 별로 없는 반면에, 불교의 영향 탓일까, '전생'이나, '환생'에 관한 스토리가 많다. 이 '전생' 또는 '환생'에 관한 이야기는 옛날 것을 기억하는 사람이 태어난다는 것이 아니라, 옛날 어떤 이의 마음을 무의식 안에 갖고 다른 몸으로 태어난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즉, 선조의 마음의 역량을 내재하고 있음을 말하는데, 요즘의 과학적인 시각으로 재해석해 본다면, 그런 DNA를 갖고 태어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아직은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내 일상생활이 DNA에 영향을 미친다면, 보다 더 좋은 DNA를 만들기 위해서는 바람직? 하게 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선조의 DNA에 내가 추가한 훌륭한 DNA를 후손에게 잘 전달해 주는 것이 바로 효도 아닐까 하는 생각을 혼자 해 본다. 그나저나 자식들이 결혼을 해야 DNA를 후손들에게 전달하든 말든 할 텐데... 그런 점에서도 나는 아직도 효도를 다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버이날에....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