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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급 박사 Jun 29. 2020

B급 박사

에필로그

졸업시험을 마친 다음 날, 눈이 귀한 Bath에 소복이 눈이 쌓이기 시작했다. 전 날 저녁부터 내리다 그치기를 반복한 눈이 아침에 다시 내리기 시작하더니 오후 2시가 넘어서 까지 그칠 기새가 보이지 않는다. 오피스도 정리해야 하고 여러 가지 처리할 일이 있어 굳이 눈길을 뚫고 걸어서 학교에 왔다. 오후에 잡혀 있던 교수님과의 마지막 미팅은 결국 눈 때문에 취소가 되었다.


눈길을 따라 학교 캠퍼스로 가는 언덕을 오르다 지난 3년간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옛 성터가 있어 마지막으로 한 번 가보자 싶어 인적이 드문 산책로로 방향을 잡았다. 쌓인 눈은 적어도 20센티미터는 되어 보였다. 대충 어디 있는지 알지만 정확한 위치를 몰라서 약간 망설였는데 거짓말처럼 눈앞에 희미하게 발자국이 나 있었다. 어차피 길도 모르니 그 발자국을 쫓아갔다. 결국 발자국의 끝에 내가 찾던 성터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희미하게 나 있는 눈 위의 발자국 하나


발자국을 따라가면서 "이 양반 다리 진짜 기네. 보폭이 어찌 이리 넓냐? 확실히 다리 길이가 다르구먼" 하면서 거친 숨을 몰아쉬는데, 갑자기 뭔가가 훅 들어왔다. "어쩌면, 박사 과정 이후에 내 삶도 이렇지는 않을까?" 박사 학위를 가진 공공기관의 직원, 전문 연구원이 아니니 연구에 집중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실무에 매몰되어 연구를 등한시할 수도 없는 어정쩡한 내게 결국 누군가가 길을 제시해 주고 있지 않을까 하는 소망이 생겼다.


눈보라를 뚫고 결국 도착한 옛 성터


'흔적이 희미하지만 누군가 걸어갔을 것이다. 혹 그렇지 않더라도 나를 인도해 줄 발자국이 있을 것이다.' 


이제는 두바이에서 변호사를 하고 있는 존경하는 옛 친구가 해주었던 이야기다. 


"너 혹시, 열심히 공부해서 사시를 패스하고 판검사가 되는 친구들의 머릿속에 있는 생각이 뭔지 아냐?" 

"글쎄, 나는 법 공부를 해보지도 않았고, 주변에 판검사들이 없어서 잘 모르겠는데..."


" '정말 정의로운 재판을 해야겠다, 법질서를 바로 세워야겠다.'... 그런 생각들이 있는 것 같지? "

"그래야 되는 거 아닐까?"


"아냐, 아냐. 적어도 내가 아는 판검사들은 대부분 '대법관이 되어야지.' '검찰총장이 되어야지.'... 그런 생각들을 더 많이 해. 그러니 정말 양심적인 재판, 정의로운 수사는 드문 거야."


친구의 말이 어디까지 맞는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어떤 자격을 갖추었다고 해서 그것을 발판 삼아 무엇이 되고자 하는 삶보다는, 그 자격의 본질에 가까운 삶을 사는 것이 더 상식적이란 사실이다.


앞으로 남은 인생 여정에서 언제,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게 될지 모르지만, 나는 여전히 엄청난 수준의 연구 논문을 찍어내는 A급 연구자와는 거리가 먼 B급 박사다. 그렇지만, 주어진 문제를 정의하고, 그 문제에 대해 폭넓게 탐구하고 깊이 연구해서 하나의 해답을 내놓을 수 있는 한 명의 연구자로서 살고 싶다. 그리고 내가 공부한 영역의 연구자로서 뿐 아니라, '삶'이라는 완전히 풀 수 없는 문제를 연구하는 구도자로서의 연구를 매일 지속하는 한 사람이 되고 싶다.


그리고, 언젠가 내가 가는 길을 따라오는 후배에게 눈 길 위를 홀로 걸어간 발자국을 남겨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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