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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급 박사 Jun 28. 2020

마지막이 다가온다..

3년 차 #5 박사 과정의 마무리..

하루하루가 짧다. 막연히 계속될 것만 같은 Bath에서의 생활도 3주가 채 남지 않았다. 집, 기타 관리비 등등 많은 것들이 다 정리되었다. 내 이름으로 남은 것은 핸드폰과 차 밖에 없다. 떠날 때가 온 것이다. 창밖의 아름다운 풍경들이 계속 눈에 밟히더니 이것도 조금씩 희미해져 간다. 서로 이별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Viva를 위해 다시 들리겠지만 나와 우리 가족이 Bath에 다시 들리게 될까? 따로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아마 어려울 것이다. 아쉬움을 남기는 이별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래도 떠날 때가 되니, 늘 들리던 커피숍의 Flat White 한 잔, 뒷마당을 나서면 바로 보이는 푸른 잔디, 너무 어둡다고 불평했던 오렌지색 가로등... 작은 것 하나하나가 무척 아쉽다. 가깝게 지냈던 이들에게 내가 곧 떠난다는 사실을 알리기가 무척 두려웠다. 이별이 아쉬워 큰 소리로 "No..., No..."를 외치던 영국 교회 목사님과 3년을 동고동락했던 연구실의 동료들에게도 안녕을 고해야 했다. 가장 가깝게 지냈던 한인 교회의 식구들과 가까운 친구들과는 계속 연락하자는 취지에서 작별 인사는 부러 하지 않았다.


아들은 학교를 마지막으로 간 날, 친구들에게서 작별 편지를 잔뜩 받아왔고 그날 오후 절친친구네에서 잡힌 플레이데이트에 흥분해있다가 다음날 아침 더 이상 본인이 학교에 가지 않는, 혹은 가지 못하는 상황이라는걸 체감하고 서럽게 울었다.(내가 자는 사이, 새벽에 일어나 한국에 있는 엄마에게 영상통화로 몇십분을 통곡했다고 한다.)


10월31일 Bath를 떠나던 날 아침, 나는 아내와 추억이 묻어있는 Bath의 단골가게 작은 커피숍에 아들과 함께 들렀다. 3여년전 헬로우밖에 못하던 아이는 토튼험이 맨시티에게 졌다는 신문기사를 흥분하며 읽어내리고 있었고, 나는 그 옆에서 마지막 커피 한잔을 했다.  


커다란 짐가방을 끌고 부쩍 커버린 아들과 함께 히드로 공항을 향했다. 정말 감사하게도 가장 가깝게 지냈던 후배가 먼 길을 무릅쓰고 라이드(영국식으로는 리프트 lift)를 해주었다. 처음 영국으로 오는 비행기에서는 일부러 런던을 배경으로 한 영화만 골라 봤는데, 서울로 오는 비행기에서는 한국 영화만 골라 봤다. 아직 학위를 끝낸 것은 아니지만 나는 다시 한국생활에 적응해야만 했다.


마땅히 머물 곳이 없었기에 일단 새 집을 구할 때까지 처가에 잠시 머물기로 했다. 아이가 잘 때 까지는 육아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아이가 잠들 때쯤, 가족들의 눈치를 한참 보고서야 집 근처 도서관으로 갈 수 있었다. 다행히 공립도서관도 12시까지 열람실 문을 열어주어 제법 늦게까지 논문 작업에 집중할 수 있었다. 상황이 100%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11월이 가기 전에 자비로운 Dr.K로부터 더 이상 내 작업에 이견이 없다는 이메일을 받았다. 그리고 공식적으로 학위 논문을 학교에 제출했다. 18.11.28일, 박사과정을 시작한 지 정확히 3년 2개월 만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최종 구술시험일자가 2월 초로 잡혔다. 3개월 동안 뭘 해야 할까? 교수님은 일단 구술시험 때까지 쉬라고 하는데, 나를 위해서 희생해 준 가족들에게 집중하고 싶었다. 오랜만의 한국생활에 모든 것이 낯선 아들과 실질적인 가장이 되어 생계를 책임져 주고 있는 아내가 조금이라도 짐을 덜 수 있도록 집안일과 육아에 집중했다. 3개월은 생각보다 빨리 갔다. 

육아에 집중하던 시절, 저 연처럼 우리 가족도 높이 날 수 있을까?

결전의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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