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급 박사 Jun 28. 2020

아내의 귀국 즈음에..

3년 차 #4 아내의 귀국 

아내 입장에서는 길고 길었던 3년간의 배우자 동반 휴직이 끝이 났다. 학회 참석을 위해 떠났던 남프랑스 지방 여행을 끝으로 우리는 이제 공식적으로 한동안 긴 유럽여행을 다닐 수 없게 되었다. 할 수 있다면 아내의 복직에 맞춰 나도 학위를 마치고 같이 귀국해서 복직하는 것이 원래의 계획이었건만, 학위를 마치기엔 3년은 무척 짧은 시간이었다. 약 2개월 후에 학위 논문을 제출하긴 했지만 최종 논문 심사와 수정이 마치지 않은 상태에서는 회사 복직도 행정상 쉽지가 않았다.


여하튼, 아내는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고 한국생활을 위한 최소한의 준비가 필요했다. 그 외에도 나는 학생으로서 영국에서 마무리해야 할 일들이 남아 있었고, 이제는 초등학생이 되어버린 아들도 한국생활에서의 연착륙을 위한 계획들이 필요했다. 


귀국을 한 달가량 앞두고서도 뭘 어찌해야 할지 몰라 매일 세 식구가 둘러앉아 손을 마주 잡고 기도하고, 각자가 원하는 계획들을 이야기했다. 아들은 친구들과 헤어져야 하는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했고, 아내는 서울에서 혼자 지내야 하는 상황을 받아들이기 어려워서 처가 식구들이 있는 부산 지역으로 복직하고 싶어 했다. 결국 아내의 직장에서는 아내의 요청을 허락해주지 않았고, 우리가 영국에서 머무는 동안 아내는 서울에서 출근이 편리한 곳에 위치한 오피스텔을 구해서 지내기로 했다.


아내를 혼자 한국으로 보낼 수 없어서 삼 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에 왔다. 분명 내 조국인데, 그 새 많은 것들이 바뀌어서 편의점에서 계산을 할 때도 모든 것이 어색했다. 카드도 바뀌었고, 모든 것이 핸드폰 번호가 기반이 되어야 하는데, 한국폰이 없는 나로서는 신분 확인조차 쉽지가 않았다. 정체성의 혼란은 오랜만에 온 내 내라에서 더 강하게 느껴졌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영국인 것이 확실했다.


아내의 오피스텔에서 세 식구가 같이 자고 일어나 아내는 첫 출근을 하고, 아들과 나는 공항으로 출발했다. 열 시간을 넘게 날아와 다시 영국 우리 집으로 왔는데... 아내의 빈자리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컸다. 허전한 마음에 문자도 많이 하고 통화도 했는데, 아내가 없는 집에 들어가는 것이 무척 힘들었다. 그즈음의 일기를 짤막하게 소개한다.




"이제 더 이상 아내는 바스에 없지만, 바스에 그녀가 없는 곳은 없다. 같이 걷던 길, 같이 보던 곳, 어딜 가도 늘 항상 함께 였기에 어디에 가도 그녀가 없는 이 곳은 마치 전혀 새로운 곳인 것만 같다. 특히, 아들이 학교가고 없이 혼자 있게 될 때는 무엇이 그리 허전한지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버겁다. "





그렇다고 감정적인 동요에만 빠져있기엔 내게 주어진 일은 생각보다 많았다. 다시 이사를 들어오신다는 집주인 덕분에 이사 준비를 해야 했고, 아들의 생일파티 준비, 논문 마무리를 동시에 해내야 했는데 어느 것 하나 만만치 않았다. 버릴 것은 버리고, 줄 것은 주고, 쌀 것은 싸면서 우리가 비워줘야 할 집은 점차 빈 공간을 늘려가고 있었다. 정확히 떠날 날짜를 확정할 수가 없기에 몇 달 정도 머물 집을 구해야 했는데, 대부분의 렌트 기간이 1년이 기본이라 마땅한 집을 찾을 수가 없었다. 우리의 사정을 뒤늦게 안 한인교회 집사님 가정이 마침 약 3주간 한국 방문을 한다고 해서 1달가량 머물 수 있으니 거기서 머물면서 다음 방법을 찾아보라고 해주셨다.


영국을 떠나기 전 처음으로 친구들을 초대하는 대규모 생일파티를 원했던 아들에게 잊지 못할 마지막 추억을 남겨주기 위해 아들이 주문했던 "축구 파티"도 차곡차곡 준비가 진행되고 있었다. 집 앞 축구장을 예약하고, 아이들과 놀아줄 축구 코치를 섭외했다. '초대장' - '감사 카드' - '기념 선물'로 이어지는 3종 세트도 모두 축구를 주제로 한 물품을 며칠간 온 시내를 쥐 잡듯이 찾아서 구해뒀다. 파티 케이크와 음식도 주문을 마쳤고, 당일에는 친하게 지냈던 아들 반 친구 부모님들이 진행을 도와주기로 해줘서 큰 걱정을 덜었다.


온 도시를 샅샅이 뒤져 구한 아들의 축구 생일파티 용품들


논문은 지도교수님의 승인이 필요했다. 마지막까지 교수님이 원하는 수준의 라이팅까지는 올라가지 못했다. 그렇지만 자상한 Dr.K는 "내용으로는 충분해 보인다. 다만, 라이팅은 시간이 더 필요해 보인다. 너의 사정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고, 한국에서 라이팅을 할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을 확보할 수 있다면 최종 마무리는 한국에서 하는 것을 허락한다."라고 해주었다. 영국에서의 마지막 미팅 시간에 교수님도 당신이 하실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를 내게 허락해 주셨다.  


아내가 한국에 머무는 동안 나는 모든 것을 혼자 해야 했다. '아내가 있었더라면... 아내가 있었더라면...'  하는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같이 있으면 늘 티격태격하는 우리이지만, 이 시간을 통해 서로의 소중함을 더욱 깊이 느끼게 된 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내게 있어 박사 과정은 단순히 학문의 성과만을 위한 것보다 가족의 소중함과 함께 인생의 깊이를 더해준 시간이 되었다. 


아! 아들의 생일 파티는 대성공이었다.  날씨와 음식, 게임 모든 것이 완벽했다. 생일 파티를 끝낸 그날 밤, 아들은 잠자리에 누어 아직 그날의 흥분이 가시지 않은채로 말을 했다. 오늘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이라고. 오늘 엄마도 있었다면 정말 좋았을뻔했다고.  서울에서 사진으로 그 날을 함께 한 아내는 자기도 모르게 흐르는 뜨거운 눈물로 아들의 6번째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이전 24화 유럽의 학회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