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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se Jul 21. 2019

롱 샷(Long Shot, 2019)

로맨틱 코미디와 페미니즘, 예술에 대한 의식의 흐름





납득이 가지 않는 관계 구축과 무리한 사건 전개.

주인공 남녀를 제외한 모든 캐릭터가 전멸에 가깝지만, 그렇다고 두 주인공이 매력적이지도 서로의 케미가 훌륭하지도 않은 절망스러운 인물 묘사와 연출.






<우리 사이 어쩌면(Always Be My Baby)>을 포함한 최근 로맨틱 코미디의 경향을 보면 공포영화에게 자리를 내준 후 안 그래도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던 재미와 흥행 그래프가 정치적 올바름을 만나 곤두박질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이미 20년 전 <노팅 힐>이라는 훌륭한 성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드라마는 여성이 남성보다 '반드시' 우위에 있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힌 나머지 자연스러운 이야기 전개와 장면 연출, 매력적인 인물 묘사와 관계 구축을 망치고 있는 것이 아닌 가 합니다. 말하자면 끊임없이 '여성이 우위에 있다'는 기호와 텍스트, 이미지를 영화에 넣어야 한다는 이념적 강박이 작품을 망친다고 해야 할까요.



<에일리언 1>, <매드 맥스>, <노팅 힐>, <매트릭스 3>, <킬 빌> 등의 영화는 여성이 적극적인 주체로서 이야기를 이끌어가면서 높은 완성도를 보여줬습니다. 이들 영화 속 여성 주인공은 남성 캐릭터보다 높은 권력을 쓸데없이 전시하거나 억압하지 않습니다. 여성 해방을 외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저 그대로 존재할 뿐이었지만 사건의 중심에 있었고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이끌어 갔습니다. 관객은 그것을 받아들였습니다.








제가 <캡틴 마블>을 못마땅하고 (무엇보다) 재미없게 본 이유도 그 선상에 있습니다. 그녀는 언제나 인상을 찌푸리고 있습니다. 항상 눈과 미간과 어깨와 주먹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습니다(감독의 의도인지 모르지만 로우 앵글이 많아서 캡틴 마블이 상대를 볼 때 항상 약간 내리깔고 본다는 이미지를 줍니다). 처음 지구에 도착했을 때 블록 버스터 비디오 가게 안에서 입간판의 머리를 날리는 장면을 보면서 저는 경악했습니다. 밑도 끝도 아무 개연성도 없이 그저 '남자'의 머리를 날려버리는 그런 연출, 여성은 남성보다 우위에 있고 강한 존재라고 끊임없이 전시하는 그 부자연스러운 모습과 연출이 반대로 캡틴 마블이라는 캐릭터를 매우 평면적으로 만들고 영화의 완성도와 재미를 반감시킵니다.



'캡틴 마블'이 "나는 당신에게 증명할 이유가 없어"라고 당당하고 멋있게 선언하지만, 사실 그것은 남녀를 떠나 인간이라면 모두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남성도 누군가에게 존재 가치를 증명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이라면 모두에게 마땅한 일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사회 생활을 하는 인간, 특히 돈을 벌어 먹는 생활을 하는 속세의 모든 인간은 끊임없이 나를 증명하기를 강요 당합니다. 선배에게, 후배에게, 동료에게, 고객에게, 상사에게, 경쟁사에게, 경쟁자에게 나는 지금의 직무와 위치에 걸맞은 능력을 지닌 적합자라고 의식적이든 의식적이지 원하든 원치 않든 끊임없이 증명해야 합니다. 그것은 남녀의 문제가 아닌, 인간이자 사회인의 존재의 문제입니다.



사회라는 관계망 안에 놓인 개인은 그 누구도 아닌 오롯한 나, 즉 자연인으로서의 나로 존재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습니다.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개인은, 인간은, 역할에 맞는 사회적인 가면을 바꿔 쓰며 끊임없이 나를 꾸미고 증명해야하는 운명을 이고 살아갑니다. 그것은 버겁고 쉽지 않은 일입니다. 여성이 여성으로서 증명해야 할 가치들 때문에 힘겹다면, 남성도 남성으로서 증명해야 할 가치들 때문에 힘겹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페미니스트들은 이 사회가 권력을 쥔 남성이 여성 일방적으로 억압적인 사회라고 주장하지만, 우린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런 단순한 거대담론으로 퉁치고 넘어가기에 이 사회는 너무 복잡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권력 관계는 시간과 공간과 상대에 따라 끊임없이 그 모습을 변화시킵니다. 영원히 일방향으로만 권력을 행사하는 이는 세상에 없습니다. <캡틴 마블> 속 사이다 같은 캐릭터와 사건, 대사들은 사실 한 꺼풀 벗겨보면 영화의 내적 완결성과 입체적인 캐릭터를 무너뜨리는 요소로 가득합니다.








진정한 페미니즘은 남녀가 평등하게 함께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것이지 여성이 남성의 우위에 서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그것이 진정한 페미니즘의 목적이라면 그 이념은 본격적인 남녀대결의 방아쇠가 될 것입니다(지금도 그런 모양새인 듯 보이긴 하지만 인터넷에서의 극성 맞은 반응들은 아직 사회에서 일부일 것입니다). 리더는 인물과 조직의 성격과 특성, 자질에 따라 언제든 남자가 될 수도 있고 여자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 리더의 성별에 구분없이 자질만 증명된다면 아무 거리낌 없이 누구든 따를 수 있다는 생각이 건강한 페미니즘이며, 그 귀결점은 어떤 일을 하든 누구를 대하든 '남녀'로 구분 짓지 않고 하나의 인간으로 보는 휴머니즘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전 얼마 전부터 이런 생각이 듭니다. 요즘 영화 속 여성의 등장 비율, 캐릭터의 주체성, 대사 한 줄 한 줄을 가지고 (심지어 동물 출연을 가지고도!) '옳고 그름'을 왈가왈부하는데 정작 사람을 죽이는 행위에 관해서는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가, 만약 페미니즘이 우리가 진정 이뤄야 할 사회적 정의에 관한 의제라면 왜 우리는 그보다 훨씬 반인륜적 행위인 살인과 폭력에 대해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는가. 만약 정말 페미니스트들의 주장대로 미디어가 사회에 깊은 영향을 끼친다면 국가는 모든 미디어에서 남을 상해하고 욕하고 죽이는 일체 행위를 금해야 하는 것 아닌가 말이죠.



이야기가 점점 산으로 가네요. 매력적인 작품, 훌륭한 작품성은 표현을 제한하는 어떠한 강박에서도 자유로울 때 실현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건 이래야 돼, 저건 저래야 돼라는 당위나 이건 이래서 불편하지 않을까, 저건 저래서 불편하지 않을까 하는 자기 검열에 빠지면 그 작품은 박동하는 생명력을 상실한 채 재미없는 선동 물로 전락하게 됩니다. 드라마나 액션 등 타 장르와 달리 로맨틱 코미디는 남녀 간 관계에 관한 이야기인 만큼 현재 변화하는 남녀 문제에 가장 민감하게 노출된 장르입니다. 어쩌면 지금의 로맨틱 코미디 몰락은 시대 변화에 조응하는 안타까운 현상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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