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인분의 잡채와 지구 멸망의 전날

by 글그림




서점 주인은 말합니다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오늘 책 한 권을 팔겠습니다.”


문장을 읽는 동안

96인분의 잡채를 마주하고 있습니다

지구가 멸망해도 다 못 먹을 양입니다


책을 사는 대신

시금치 뿌리를 다듬고 있어요

한 줄기씩 식감에 대해 생각하면서요


잡채는

익힐수록 부드러워진다지만

왜 저는 당면보다 투명해질까요


대기업 감미료로 단맛을 입힌 인생이라

너무 끈적여서 일까요


책방에는 사람이 없고

마트엔

유통기한 지난 소금이 쌓이고

둘 사이 어딘가에서

양념도 없이 삶을 물처럼 휘젓고 있어요


책방과 마트 사이엔

유통기한 지난 하루가 놓여 있어요

바닥에 흐른 양념처럼

누구도 닦아내지 않는 마음이요


어쩌면 오늘은

96인분의 잡채를 만들며 끝날 거예요

책 대신 당면을 택한 인간처럼

농담 섞인 한숨을 삼킬게요


하지만

지구가 멸망해도

책 파는 서점 주인도

잡채 만드는 엄마도

각자의 방식으로 마지막을 살겠죠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 해도

오늘 잡채를 합니다

96인분의 위로가 되면 좋겠어요

책 보다 따뜻한

빈그릇째 먹는 이야기처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