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한 방향으로 벗기세요

by 글그림



바나나는 한 방향으로만 벗겨지니까

오늘도 오른손으로만 하루를 펼칩니다

팔꿈치부터 저녁까지 천천히 까봅니다


마트 앞에 진열된

가격표가 떫은 과일을 삼킨 듯 말이 없고

내 표정은 덤으로 받은 복숭아처럼 말랑해졌습니다


복숭아를 깎으면 비 오는 날 같아요

과일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추억에 과즙이 많아서겠지요


택배 상자 속엔 빠져 있는 것이 있습니다

주문하지 않은 외로움이나

포장된 기대 같은 것

우리는 뽁뽁이 속에 잘 숨겨두고 살지요


이런 날엔 길거리에서 귤 하나를 까서 먹습니다

껍질까지 맛있어지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요

지퍼백에 감정을 담았다 꺼내어

다시 냉장실에 넣는 일도 이제는 지겹거든요


저녁에는

감자를 들고 거울을 보았습니다

눈이 나란히 세 개씩 달려 있었습니다

나도 세상을 그렇게 봐야겠지요

한 눈은 익숙한 쪽

한 눈은 낯선 쪽

나머지 한 눈은 껍질을 향해


오늘은 껍질이 나를 위로했습니다

하루의 껍질 안에

나 같은 씨앗 하나 묻어 있을 것 같아서요


내일은

바나나처럼 매끈한 하루였으면 좋겠습니다

쪼그라들지 않고

천천히 벗겨지고

쓸쓸한 모양 그대로 먹힐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