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역학 제2법칙

-유리잔 속의 독백

by 글그림




햇빛이 찬장에 부딪혀

그릇마다 금이 가 있어

그중에 제일 얇은 유리잔을 바라봐


얼음을 넣는다는 건

매번 헤어짐을 예상하는 거야

투명한 건 사라진다는 뜻이야


냉장고 앞에 오래 서 있었어

더위를 피해 꺼낸 얼음들이

부럽다고 생각한 적 있어

걔네는 절대 원래 상태로 돌아가지 않잖아

결정적인 순간에 가장 빨리 녹아버리는 것들 말이야


탁자에 방금 놓은 유리잔이 울고 있어서

작은 물자국이 남아

온기가 사라진 자리엔

모양 없는 기억이 증발하고 있어


혼자 중얼거림이 점점 길어져

잡히지 않는 파동 속에서

난 자꾸 귀를 기울여

이미 지난 시간에 계속 물을 주는 습관,

잊어야 할걸 자꾸 되돌려 보는 거지

유리는 깨지기 전까진 그냥 잔일뿐이야


“더 강해져야 해”라고 쓴 쪽지가

냉장고에 붙어있어

묻고 싶었지

강인함은 얼마나 딱딱한 건지

무너지지 않으려면 얼마나 더 꽝꽝 얼어야 하는지


모든 질문이 끝나는 지점은

늘 똑같은 말이야

“이미 늦었어”


시계는 멈춰 있고

방 안은 점점 조용해지고

난 아직도 얼음을 씹고 있어

네가 와본 적 없는 방의 온도는

오늘도 조금씩 내려가고 있어


얼음은 다시 얼지 않고

말은 다시 삼켜지지 않아

난 부서지지 않으려고

천천히 투명해지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