캡틴과 기관장은 반성문 쓰기 싫다고 상륙을 나가지 않았다.
하긴 수십 년 배를 타면서 오만 데 다녔는데 자유스럽게 상륙 나가는 것도 아니고 감상문을 써서 안기부에 바치는 게 내키지 않았을 것이다.
안 나가고 말지.
선원 몇이 육지 바람 쐬러 걸어 나갔다가 부두 근처에 카페 간판이 보여 들어갔다.
들어가 보니 손님은 별로 없고 거리만큼이나 한갓졌다.
러시아에서는 카페가 밥 파는 레스토랑 개념인 모양이다.
커피 파는 찻집은 현지어로 '카페이냐'라든가.
늘씬한 웨이트리스가 메뉴를 들고 모델 스텝으로 살랑살랑 우리 테이블에 다가왔다.
다른 나라에서는 아가씨들에 작업한다고 예쁘니 어쩌니 하면서 농담 따먹기를 잘했는데 공산국가에 들어오니 감상문 거리 만들기도 께름칙하고 졸아서 주위 눈치만 본다.
킹크랩과 보드카를 시켰다.
사람이 몇 되다 보니 좋아하는 양갈비와 절인 청어를 더 시켰다.
어차피 내가 다 계산할 건데, 월급 더 받는 젊은 사관은 당연히 품위 유지비가 드는 거고 계산할 때 신발 끈 매고 있으면 쪽 팔리잖아.
기본으로 나온 캐비어와 배에서 먹기 힘든 신선한 샐러드에 예쁘고 하늘하늘한 러시아 아가씨를 봤으니, 본전은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술 마시지 않는 선원이 콜라를 시키니 펩시가 나왔다.
모스크바 엑스포 때 펩시콜라 직원이 소련 서기장 흐루쇼프에게 콜라를 권하자, 잔을 받아 닉슨과 건배했다.
그리고 이 사진이 전 세계에 퍼지면서 펩시콜라가 뜨고 소련의 콜라 시장을 독점하였단다.
철의 장막이라는 공산주의 종주국 땅을 밟고 상상 속의 인민들을 직접 보니 이들도 우리와 다름없는 평범한 사람이거늘 어찌 내 마음속에는 머리에 뿔 난 괴물 이미지로 자리 잡았을까.
세뇌 교육의 힘이 이렇게 무서운 모양이다.
학생 때 이백 원인가 주고 사 본 삼중당 문고판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가 생각난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는 주인공 슈호프가 강제수용소에서 아침에 일어나 강제 노동하고 잘 때까지 꼬박 하루 동안 그와 주변 인물들의 일들을 솔제니친이 담담하게 써 당시 스탈린이 만든 강제수용소의 실상을 전 세계에 알렸다.
수용자들은 얇고 해진 죄수복을 입고 빈대가 끓는 낡은 침구에서 자며 추위에 떨었다.
끼니라고는 딱딱한 검은 빵과 죽, 멀건 수프 조금이 전부라 늘 배고프고 영양실조에 시달렸다.
교도관들은 수용자를 사람 취급하지 않아 두들겨 패고 조금이라도 눈에 거슬리면 독방으로 보낸다.
노동 환경도 매서운 추위에 가혹하기 이를 데 없다.
그나마 영하 41도가 되어야 강제 노역을 쉰단다.
잡혀 온 죄도 별거 아닌 것 같은데, 솔제니친의 자전적 인물 슈호프는 독소 전쟁 중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혀 이틀 만에 도망쳐 원대 복귀했다.
하지만 자아비판하는 자리에서 상관이 적에게 포섭된 스파이라고 몰아붙여 졸지에 국가 반역죄를 지은 죄수가 되었다.
주인공이 일하는 작업반의 반장은 단지 아버지가 부르주아였다고 군대 생활 잘하다가 끌려와 다행히 미치지 않고 복역하고 있다.
더 웃기는 것은 그를 수용소로 보낸 군 장교들 역시 숙청돼서 처형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가 군대에서 쫓겨나 기차 타고 집으로 돌아갈 때 친절하게 대했던 여대생들도 나중에 잡혀 수용소에 갇혔다고 한다.
도대체 인간미라고는 눈곱만치도 없고 서로 감시하고 의심하는 지옥 같은 사회 분위기이다.
대부분 수감자는 인간 이하의 생활을 하면서도 의외로 참혹한 현실에 잘 적응하고 나름 작은 것에도 행복을 느끼며 사는 것이 어린 나이에 이해가 잘 안 갔다.
책이나 영화에서 보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도 수감자들의 체념에서 오는 비슷한 심리를 느낀 적이 있었다.
학생 때 배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적응과 개선을 한다.'는 말이 맞는가 보다.
군대 갈 때나 지금이나 합리적인 사고로 행동한다는 이유로 좀생이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고, 세상 험한 꼴은 별로 겪어보지 않았다.
그런데 논산 수용연대에 입대하고부터 난생처음으로 비인간적인 대우는 물론 상습적인 구타를 경험했다.
그래도 제도권에 저항할 엄두도 못 내고 잘 적응할 수 있었던 것은 책에서 본 소련 수용소나 아우슈비츠보다는 나은 생활이라고 자위하며 이 또한 지나가리니 하고 생각했기 때문인 거 같다.
그리고 나 혼자 겪는 게 아니고 동기 모두 똑같이 구르고 처맞으니 견딜 수 있었다.
군대에서 군기 잡는다고 후임을 때리고 돌리는 것이 전투력 향상에 정말 필요한 것인가?
예전에 본 책에 일본 관동군 부대에서 20대 초반 선임이 40대 후임 삼촌 뻘한테 막말로 쌍욕하고 조패는 장면을 보고 놀란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일본군의 그런 악습이 자위대까지 이어져 내려온다고 한다.
그런 일본인이기에 아직도 갈라파고스의 고립 신드롬을 벗어나지 못하는 건가.
군대의 필요악, 폭행 전통이 근대에는 프로이센 군에서 있었다고 한다.
그게 독일, 일본으로 해서 국방군에까지 이어진 모양이다.
중국인민해방군이나 이스라엘군은 후임을 인격적으로 잘 대해준다는 소리를 들었다.
군대 먼저 왔다고 전우끼리 얼차려와 구타가 난무한다면 과연 전쟁이 났을 때 총구가 어디로 향할까.
죽이고 싶도록 미운 선임이나 부당한 상관을 쏴버리고 싶은 생각이 드는 군대에서 제대로 된 전투력을 기대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