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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운엽 Jun 22. 2024

노보로시스크에서 라리사와 마지막 밤

닥터 지바고, 라라의 테마


내일이면 밀을 다 풀고 노보로시스크에서 출항한다.

다음 항구는 리비아 사막의 작은 도시 마사 엘 브레가에서 화학 비료를 싣고 서아프리카로 간다.

앞으로는 당분간 상륙 재미는 없을 것이다.

노보로시스크에서 다시 오지 않을 아쉬운 마지막 날을 뭍에서 사람 사는 것을 구경하려고 혼자 상륙 나왔다.

제정 러시아 때부터 있었는지 오래되고 웅장한 건물 곳곳에 지도자 동지의 사진과 낫, 망치가 그려진 붉은 국기가 나부낀다.

표정 없는 인민들이 지나다니는 암울한 회색빛 도시를 한참 걷다가 다리가 아파 한 카페 앞에 섰다.

알싸한 보드카 한잔하면서 언제 다시 올지 모를 러시아를 더 느껴보고 싶었다.


소냐가 일하는 카페와는 비교가 안 되게 고색에 엔틱 장식이 있는 듯 없는 듯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파스테르나크가 제2의 고향이라고 하는 그루지야에서 가까운 이곳 카페에서 지인들과 식사하고 갔는지도 모르지.

1930년대 숙청의 피바람 속에서 닥터 지바고를 쓴 시인 파스테르나크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스탈린의 고향 그루지야의 작품을 번역한 인연이었다.

스탈린과의 면담에서 파스테르나크를 '너무 자기 세계에 빠져서 혁명이 뭔지도 모르는 또라이'로 분류했기에 '구름 속에서 오락가락하는 이놈을 건드려 봐야 인민이 낸 세금이 아깝다.'라고 비밀 경찰에게 지시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눈에 봐도 효리 아가씨도 시기할 만큼 아름답고 늘씬한 한 소비에트 여인이 웃으며 다가왔다.

양 손바닥을 내밀어 펴 어깨를 한 번 들썩이고 같이 팔짱을 끼고 카페에 들어갔다.

이 여인에게 필요한 것은 일용할 양식과 약간의 달러일 것이다.

그녀는 한국인 입에도 맞는 만두와 샤슐릭이라는 양꼬치를 시켰다.

이란이나 터키, 그리스에서 먹는 양고기 꼬치나 케밥은 식사로도 좋고 술안주로도 훌륭하다.

소금 찍어 먹는 호밀로 만든 흑빵과 절인 오이, 당근과 다진 소고기를 넣고 끓인 라쏠니크라는 새콤하고 짭짤한 수프가 먼저 나왔다.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지만, 오이나 토마토를 넣고 국을 끓이면 담백하게 먹을 수 있다.

나는 러시아 국민주 보드카에 그녀는 알코올이 함유된 요구르트로 건배하였다.

곧 항구를 떠날 마도로스의 고독한 영혼을 누가 헤아릴 수가 있을까?

라리사라는 예쁜 러시아 아가씨와 손짓, 바디 랭귀지로 공허하게 웃고 즐기는 가운데 영원히 멈췄으면 좋을 밤은 깊어만 간다.


러시아 혁명의 격변기에 군의관 유리 지바고의 파란만장한 삶 속에서 만난 운명 같은 사랑, 라라.

20세기 초 러시아의 모습을 생생히 전하는 한 편의 대하소설 닥터 지바고는 의사이자 시인이었던 지바고의 정신세계와 삶의 철학이 들어있다.

파스테르나크는 이 글을 쓰고 소련의 문학지에 기고하려 했지만, 거부당했다.

우여곡절 끝에 이탈리아에서 첫 출판을 하고 이듬해 노벨문학상 수상이 결정됐다.

소비에트 당국은 파스테르나크를 지속해서 압박했고, 결국 파스테르나크는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노벨상을 거절했다.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하여 큰돈을 벌었던 알프레드 노벨의 유언대로 스웨덴 아카데미에서는 파스테르나크를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지명했다가 수상을 잠시 미루었다.

그러나 그는 소련 작가 동맹에서 제명되고 추방당할 위기에 처했다.

파스테르나크는 흐루쇼프에게 '조국을 떠난다는 것은 저에게 죽음을 의미합니다.'라고 간곡히 청원하여 겨우 추방만은 면한 채, 소설 닥터 지바고 단 한 편만 남기고 모스크바 외곽에서 지병으로 쓸쓸히 돌아가셨다.

노벨상 수상자로 지명된 영광은 잠시, 냉전 체제에서 그의 말년은 정신 사납게 된 것이다.


금서였던 닥터 지바고가 1988년 러시아에서 출판되고 파스테르나크의 명예가 회복되면서, 이듬해 작가인 장남이 노벨상을 대리 수상했다.

이 노벨문학상 수상 과정에 미소 냉전 시기 소련의 체제를 흔들기 위해 미국 CIA가 개입되었다고 한다.

얘들은 약방의 감초처럼 안 끼는 데가 없어.

여주인공 라라는 실존 인물인 파스테르나크의 애인이 모델이라고 알려져 있고, 작가의 이상적인 러시아 여인상이라고도 한다.

아름답고, 열정적이며 의지가 강한 여성 라라는 유리를 만나 불타는 사랑에 빠진다.

라라는 소련에서 라리사의 애칭이다.


우리가 기억하는 닥터 지바고는 할리우드 영화가 아니고 영국, 이탈리아 합작 영화라고 한다.

냉전 시절 당시에 눈보라 치는 설원을 러시아에서 촬영할 수 없어 스페인에서 하얀 돌가루를 뿌리며 찍었고, 여러 부문에서 아카데미상을 받았으며 흥행도 대박을 터트렸다고 한다.


왜 소설이나 영화에서는 연인들이 불같이 사랑하다 빨리 죽느냐고.

자식, 손자 보고 행복하게 좀 오래 살지 않고 말이다.

사랑이란 건 우리가 하지만 인연을 주는 건 우리 손밖을 떠난 하늘의 일인가?

나도 늘 가슴이 뛰는 사랑을 하고 싶다.

사랑이라면 대낮에 부끄러울 수 없다.

, 그래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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