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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운엽 Nov 30. 2023

그리움은 파도에 흘러가고



"꽃피는 동백섬에~ 보~미 왔거언~만…"
기관부 막둥이 서 군의 선창에 맞춰 다른 선원들도 젓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장단을 맞추고 배가 떠나가게 노래를 불렀다. 까르따헤나에서 잡은 고기로 ‘NAMMI SPIRIT’ 호에서는 늦은 회식이 벌어졌다. 이런 자리에서는 즐거운 분위기로 이끌어 가는 끼가 있는 선원이 꼭 한두 명 있기 마련이다. 오늘은 서 군이 분위기를 신나게 이끌어갔다. 노래를 잘못하는 다른 선원들을 자연스레 리드하면서 장단을 맞춰주고 또 다음 선수로 부드럽게 이어갔다.  
“안 나오면 쳐들어간다~ 꿍짜자 꿍짝~ 엽저~언 열 닷 냐아~앙~”

군중 속의 고독이라 했던가, 나는 해상생활을 하면서 명절과 생일에 가족과 함께하지 못하고 객지에서 이렇게 혼자 지내는 외로움에 익숙해져 있다. 회식 자리에서도 성격 탓도 있겠지만, 직책에 비해 나이가 어리다 보니 나대지 않고 애꿎은 술잔만 비우면서 구석에 처박혀 있는 편이었다.

카리브해의 검은 바다 위, 눈앞에는 까르따헤나의 야경이 서러울 정도로 아름답게 보인다. 아스라이 멀리 항해하는 선박의 홍등이 보였다. 밤에 항해하는 선박은 충돌을 하려고 국제 협약으로 좌현에는 홍등, 우현에는 녹등을 켜고 운항하게 되어있다. 이 밤에 어디로 가고 있을까?




학교 다닐 때 동기들과 술자리가 끝나고, 어쩌다가 남희와 둘만 남아서 눈 내리던 동숭동 거리를 걷던 기억이 났다.
"내 꿈은 배를 타고 세계 여행을 하는 거야. 그래서 꼭 라이선스를 따서 외항선을 탈 거야. 가는 곳마다 예쁜 그림엽서에 그 나라 인상과 향기를 적어 보낼게."   
남희는 술기 어린 내 눈을 잠시 바라보다가 머리를 쥐어박으며 말했다.

"야, 짜샤! 너 지금 취했냐? 소설 쓰고 있네. 어디 포장마차에 가서 소주나 한잔 더 마시자. 눈 오니까 별 청승을 다 떠냐." 
그런 남희에게 뭔 정이 들었겠는가. 가시나가 도대체 조신한 맛이 있어야지. 머쓱하니 입 다물고 쓴 소주잔이나 기울일 수밖에. 그녀가 소개해 준 선미라는 아가씨가 오버랩되었다. 선미 씨는 선머슴과는 대조적이었다. 시집가면 살림도 잘하고, 애 잘 키우고, 두루두루 살갑게 잘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아가씨였다. 물론 살아봐야 알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참, 별 희한한 일도 다 있지. 재수 없다고 구겨서 버린 그녀들의 편지가 아귀 에서 나올 줄이야. 참 대단히 질긴 인연이었다. 주소는 알아볼 정도가 되어 편지를 쓰긴 썼는데 옛 쌉쌀한 감정이 되살아나 간단히 안부만 고 말았다.

노랫소리가 그친 지 꽤 된 것 같았다. 술이 거나해진 덩치가 남산만 타수가 나를 한참 찾았다며 집에 전화를 걸어달라고 했다. 당시 배에서 전화하려면 항구의 무선 전화국에서 전화가 연결되면 요금도 싸고 좋은데, 먼바다를 항해할 때나 시스템이 안 되어 있는 항구에서는 요금이 비싼 INMARSAT 위성 전화를 이용해야 한다. 그런데 요금이 비싸서 일과 후에 술을 안 먹은 상태에서만 전화를 걸어 준다. 오랫동안 가족과 떨어져서 거친 파도와 싸우며 냄새나는 홀아비들하고만 생활하니 술 마시고 고국에 있는 가족들과 통화하다 보면 보고 싶어 자제가 안 돼 당장 하선하겠다고 난리를 치는 선원도 있고, 그런 전화를 받은 고국의 사랑하는 가족들 마음은 어떻겠는가. 게다가 술김에 조금 길게 통화했다 하면 백 불짜리 몇 장은 금방 날아가는 살인적인 위성 통신 화 요금은 어쩌라고.

그런 이유로 삼타에게 조용히 내일 맑은 정신일 때 전화하자고 말하는데 눈동자가 희돌아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잠시 후 선실 복도에서 뭔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힘없는 내가 나서봤자 들을 턱도 없고 해서 침실 문을 걸어 잠그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웠다.

그렇게 카리브해의 일엽편주에서 마도로스들의 밤의 열기는 사라지고 날이 밝아 통신실에 가보니 그 열기의 잔해가 남아 통신실 문짝에 도끼 자국이 는 게 아닌가. 어젯밤 의처증이 있는 타가 술 한잔 걸친 김에 집에 전화를 걸어 부인의 안부를 확인해야 하는 데 전화를 안 걸어주니 성질이 나서 선내 방화 도끼를 들고 춤을 춰 빈 선실에 감금하고, 말리던 선원 두어 명이 다쳤단다. 이런 경우 전화를 걸어주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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