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릴라

읽을 때마다 새롭게 읽히는 앤서니 브라운의 작품 세계

by 주아유

앤서니 브라운은 수많은 수상경력을 가진 작가로, 아이를 키우고 있는 부모님이라면 대부분 그의 이름을 들어보셨을 거라 생각됩니다. 그의 작품은 완벽한 구성, 간결하고 유머러스한 글, 세밀하고 상징적인 그림, 기발한 상상력으로 유명합니다. 또한 작품에 숨겨진 명화를 찾을 때의 기쁨, 읽을 때마다 달리 보이는 그림들의 의미를 해석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많은 이들이 사랑하는 작가이기도 합니다.


‘고릴라’에는 한나라는 소녀가 주인공입니다. 아빠와 단둘이 살고 있지만 바쁜 아빠는 한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지 않습니다. 한나는 곧 다가오는 자신의 생일에 아빠에게 고릴라를 선물로 달라고 부탁합니다. 하지만 아빠가 생일에 준 것은 고릴라 인형입니다. 실망한 한나는 생일밤, 신비로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선물로 받은 고릴라 인형이 진짜 고릴라가 되어 아빠의 옷을 입고서 함께 동물원에 갑니다. 아빠와 함께 하고 싶었던 일들-영화를 보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춤을 추며 행복한 시간을 보냅니다. 아침이 되어 한나는 그 모든 일이 꿈이었음을 알게 되지만, 그날 아빠가 한나에게 동물원에 가자고 제안하며 한나의 진짜 소원이 이루어집니다.

이 책은 부모와 자녀 간의 소통의 부재로 인한 외로움을 세밀한 그림과 따뜻한 색채로 섬세하게 표현해 냅니다. 특히 고릴라와 함께하는 환상적인 모험은 아이의 내면에 자리한 결핍, 소망, 불안, 치유의 과정까지 아름답게 보여줍니다. 꿈과 현실이 맞닿은 결말을 통해 행복해하는 둘의 뒷모습을 보며 앞으로 달라질 둘의 관계를 기대하게 합니다.




앤서니 브라운이 고릴라를 선택한 이유

1. 인간과 닮은 고릴라의 눈

앤서니 브라운은 여러 인터뷰에서 “고릴라의 눈이 인간의 눈과 닮았기 때문에 특별한 애착을 느낀다”라고 밝혔습니다. 그림을 통해 고릴라의 눈에서 깊은 인간성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2. 아버지에 대한 기억

고릴라는 앤서니 브라운에게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리게 하는 존재입니다. 건장하고 점잖지만 때로는 무서웠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의 이미지를 고릴라에 투영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이 그림책에서 고릴라는 아버지의 옷을 입고 한나와 함께하며, 아버지의 대리자이자 보호자의 상징으로 등장합니다.


3. 영화 킹콩의 영향

어린 시절 본 영화 ‘킹콩’이 앤서니 브라운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고 합니다. 영화 속 고릴라의 강인함과 따뜻함, 인간적인 고독과 슬픔이 그에게 큰 영감을 주었고, 이후 그의 작품에 반복적으로 고릴라가 등장하는 계기가 됩니다.


4. 고릴라의 복합적 성격

고릴라는 가족에게는 따뜻하지만, 위기 상황에서는 강인하고 공격적으로 변하는 이중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런 복합적 성격이 아버지의 이미지를 닮았을 뿐 아니라, 작가로서 다양한 감정과 텍스처(주름, 털 등)를 표현하는 데 매력적인 소재였다고 합니다.

단순히 고릴라를 좋아해서 그림책의 소재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에 대한 기억, 예술적이면서도 상징적인 표현이 가능한 동물이기에 선택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고릴라는 한나의 부성애를 채워주는 존재이자 인간과 가장 닮은 동물로서, 철장 안에 갇힌 고릴라의 모습과 아버지의 옷을 입고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고릴라가 대조되며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심리학적 분석-자기 심리학

자기 심리학(Self Psychology)은 오스트리아 출신 정신분석가 하인즈 코헛(Heinz Kohut)이 창시한 심리학 이론입니다. 이 이론은 기존 정신분석이 성적·공격적 본능(추동)에 초점을 맞췄던 것과 달리, '자기(self)'의 발달과 유지, 그리고 자기애적 욕구의 충족에 중점을 둡니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아이는 건강한 자아를 형성하기 위해 부모와의 교류(자기 대상 경험)가 필요합니다. 한나에게 아빠는 절대적인 자기 대상(자신을 반영해 주고, 이상화할 수 있는 대상-주로 부모)이지만, 현실에서는 그 역할을 충분히 해주지 못합니다. 한나는 환상 속 고릴라와의 교감을 통해 심리적 안정감과 자존감을 회복하게 됩니다. 결국 현실의 아빠도 한나의 마음을 이해하고 변화함으로써, 한나의 내면적 결핍이 해소되고 심리적 치유가 이루어집니다.



융의 심리학적 관점에서의 분석

‘그림책의 마음(조자현, 이나미)’에서는 한나와 한나의 아버지를 한 사람으로 봅니다.

한나라는 여성에게는 두 가지 얼굴이 있는데, 아버지 콤플렉스 때문에 하루 종일 바깥일에 몰두하는 아버지의 얼굴과, 마음속에 홀로 외로이 남겨져 있는 소녀 한나로 말이죠. 또한 고단하게 일을 하며 스스로를 지치게 만드는 여성들은 아버지 콤플렉스의 영향 아래 있는 경우가 많다고 말합니다. 일 위주의 일상, 목표 지향적인 삶에서 한나는 소외됩니다. 한나는 꿈속에서 고릴라와 동물원을 방문하게 되는데 이는 무의식과의 대면을 의미합니다. 이는 자기(Self)를 찾기 위한 필수 단계로 볼 수 있습니다. 꿈에서 깨어난 후 아버지가 바나나를 가지고 동물원에 데려가는 결말은 의식과 무의식의 화해를 암시하기도 합니다.


작품 전반에 숨겨진 고릴라 그림(액자, 전등갓, 킹콩 포스터)은 ‘집단 무의식’에 내재된 원형을 반영합니다. 칼 융의 관점에서 볼 때, 고릴라는 ‘아니무스(Animus)’의 원현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아니무스는 여성의 무의식 속에 존재하는 남성적 측면으로, 한나에게 부재한 아버지의 따뜻함과 보호를 대신 제공하는 존재입니다. 고릴라는 물리적으로 크고 강하지만 동시에 부드럽고 보호적인 존재로 묘사되어, 한나가 갈망하는 아버지 상을 상징합니다.


창살에 갇힌 고릴라의 이미지는 현대인의 고립감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더불어 아버지의 달라진 모습을 통해 보여주는 가족 관계의 회복 가능성은 현대 사회의 소통 단절 문제에 대한 은유적 표현으로도 보입니다.



이 작품은 어린이 독자에게는 ‘환상과 위로’를, 성인 독자에게는 숨겨진 기호들의 의미를 보물찾기 하듯 찾아보게 하는 재미를 안겨줍니다. ‘고릴라’에 대한 여러 해석을 읽으면서 단순한 아동 문학을 넘은 심오한 심리적 여정을 담아낸 그림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앤서니 브라운 특유의 섬세한 일러스트와 일상 속에 숨겨진 초현실적 요소들을 보는 재미만으로도 쏠쏠한 작품입니다.

꿈과 같은 모험을 통해 자신의 상황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자아를 완성해 가는 과정이라는 해석도 흥미로웠지만, 부모의 입장에서 자녀와의 정서적인 유대가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하는 작품이었습니다. 읽을 때마다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되는 그의 책을 통해 아이들의 세계를 더욱 깊이 이해하고, 우리 자신의 내면 아이와도 다시 연결되는 기회를 얻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keyword
토요일 연재
이전 06화괴물들이 사는 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