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될까?” 가슴을 조이는 의심의 목소리

의심의 칡넝쿨과 함께 머무는 알아차림.

by 조이캄JoyCalm

머리 한가운데서 들려온다.

“이게 될까?”

“내가 할 수 있을까?”


새로운 시도 앞에 서면, 늘 되풀이되는 이 속삭임.

익숙할 정도로 낯설고, 낯설 만큼 익숙한 그 말들이다.

그 목소리는 마치 여름날 나무를 휘감는 칡넝쿨 같다.

해를 가리고, 숨을 막고, 자라나는 것을 멈추게 만드는,

말없이 조여 오는 힘.

줄기는 손으로는 끊을 수 없고,

낫이나 칼, 때로는 포클레인이 있어야 겨우 베어낼 수 있을 만큼 질기고 깊다.


나는 지금,

연구논문을 대중서로 엮기 위해 초안을 들여다보고 있다.

그리고 어김없이, 그 재잘거림이 시작된다.

“이게 될까?”

"내가 할 수 있을까?"


초안을 내려놓고, 눈을 감는다.

숨을 길게 내쉬며, 잠시 멈춘다.

숨을 고르고, 마음을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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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차림.

지금 내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가슴은 조이고, 어깨는 무겁고, 시선은 자꾸 멀어진다.

그것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다.

부정하지 않고, 밀어내지 않고,

그저 바라본다.

“아, 또 칡넝쿨이 올라오고 있구나.”

나는 마음챙김 한다.

생각을 억지로 바꾸려 하지 않고,

그 재잘거림을 있는 그대로 듣는다.

마음속 어두운 구석에서 자라나는 칡넝쿨의 소리를

억누르지 않고, 도망치지 않으며,

잠시 숨 고르며 지켜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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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지켜보는 이유는

내 안의 의심을 없애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의심과 함께 머물기 위해서다.


의심의 소리를 알아차리며,

그때 내 몸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조여옴을

있는 그대로 느끼는 일은 달갑지 않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 두려움과 의심과 함께 머무르며

이 불편한 감각을 고스란히 품어내는 지금,

나는 나아가고 있고,

나는 자라고 있다는 것을.


마치 다시 햇빛을 향해 줄기를 뻗는 나무처럼.

그러니 오늘도

익숙한 의심의 소리에 이렇게 대답한다.

“그래, 이게 될 거야.”


그리고 나는

마음속 칡넝쿨 한 줄기를 조용히 베어낸다.




지금 내가 마주하고 있는 이 마음의 흐름을, 심리학과 마음챙김의 언어로 풀어보고자 한다. 이는 내면 깊은 곳에서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생각에 휘둘리지 않기 위한 하나의 연습이기도 하다. 때때로 우리는 그런 재잘거림 앞에서 시도조차 하지 못하고, 스스로 좌절하며 가능성의 문을 닫아버리곤 한다. 그러니 오늘 이 마음챙김의 방법을 기억해 두고, 다음에 그런 순간이 찾아올 때 조용히 꺼내보면 좋겠다.


심리학적 관점에서 볼때 "내가 할 수 있을까", "이게 될까"는 자기 비판(self-criticism)의 전형적인 표현이다. 이는 부정적 자동사고로 분류되며 불확실성과 두려움이 활성화될 때 자주 등장한다. 나는 나의 내면으로 부터 매우 자주 듣는다. 그럼에도 해나가려고 하니 나 자신이 얼마나 힘들겠는가... 그럼에도 시도한다.


이러한 내면의 목소리를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고 따라가는 대신 메타인지적 거리두기(distancing)를 통해 관찰할 수 있도록 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때 필요한 것이 마음챙김이다. 마음챙김은 판단없이 있는 그대로를 주의두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알아차림이 일어난다. "알아차림, 지금 내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이 질문을 통해, 내면에서 활성화되는 자기 비판의 목소리에 대항할 수 있다. 나 자신을 보호하는 내면의 만트라가 된다. 이 질문은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는 자기 비판의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힘없이 끄달려가기보다 알아차림의 의식을 활성화하여 반응을 선택하도록 도와준다. 오늘 나의 선택적 반응은 "그래 이게 된다"라고 말하는 것, 글쓰기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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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과 함께 머무는 태도를 심리적 유연성(Psychological Flexibility) 이라고 말한다. 말이 쉽지 참 어렵다. 의심이 일어날 때는 몸에서 불편한 감각들이 발동하기 때문이다. 가슴이 살짝 조여오고, 팔다리에서 힘이 빠지고, 어깨도 쳐지고 얼굴은 찌그러 드는 곤란한 감각들을 인내해야 한다. 이러한 몸의 현상을 고스란이 느끼는 시간이 필요하다. 말처럼 쉽지 않지만, 그럼에도 할 수 있다. 잠시 그냥 그것들과 함께 있으면 된다. 힘겨운 것을 참는 것과는 살짝 다른 결이다. 집에 찾아온 반갑지 않은 손님이 물한 모금 드시고 갈 수 있도록 잠시 기다리는 느낌이랄까.


이렇듯 불편함을 고스란히 경험하면서 지금 이 순간 일어나고 있는 어떤 현상을 있는 그대로, 완전하고 깊이 받아들이태도를 급진적 수용(radical acceptance)라고 한다. 이는 그 현상을 좋아하거나 동의하거나 찬성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과의 싸움을 멈추고, 그것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마음챙김이 지금 이 순간의 경험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이라면, 금진적 수용은 그 인식한 현실을 완전히 수용하는 태도이다. 마음챙김은 "지금 이런 생각이 떠오르고 있구나"라고 알아차리는 것이라면, 급진적 수용은 "그 생각조차 지금 내 일부구나"라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마음챙김과 급진적 수용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상보적 관계이다.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고 받아들임으로써 그 현상에 대한, 그 현상을 다루기 위한 지혜와 앎이 따라온다.


이것은 수용전념치료(ACT, Acceptance and Commitment Therapy)의 핵심개념과 닮아 있다. 불편한 생각이나 감정을 없애려고 하기보다 그것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면서, 내가 원하는 중요한 가치에 집중하고 그에 걸맞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불구하고..행동한다..'와 같은 것이다. 칡넝쿨을 잘라내기 전에 그것을 알아차리고 함께 숨 고르며 나아가는 것은 심리적 유연성을 훈련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데, 글쓰기를 통해 나는 나의 자동적 무의식적 부정적인 감정을 처리하고 사고와 행동을 통합하고 있다. 글쓰기를 통해 감정을 표현하고 구조화하는 행위는 정서해소와 자기 통합을 돕는 강력한 도구이다. 치유적 글쓰기와도 같다. 감정을 단순히 털어놓는 것을 넘어, 글을 통해 의미를 재구성하는 것은 스스로를 가치있게 만들어주는 유익한 경험이 된다.


오늘은 무의식적 비판적 의심의 목소리를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며 행동에 전념하는 과정을 유리알 보듯이 기록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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