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바람이 거세다면 앞장서서 걷고 있는 중이다.
선선한 저녁, 도심을 가로지르는 강을 따라 난 산책길에는 평소보다 사람이 많았다. 맞은편에서 몸에 붙는 노랑 상의에 검정 레깅스를 입은 젊은 여자가 걸어왔다. 적당한 키에 마스크를 끼고 특별한 것 없는 평범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노란색 의상 때문이었을까 그녀의 걸음과 몸짓은 신발에 스프링이라도 달린 것처럼 탄력이 넘쳤다. 그녀의 에너지 넘치는 모습에 나도 덩달아 발걸음에 힘이 실렸다.
빠른 걸음으로 앞서 걷던 중년 부부를 따라잡았고 그들의 대화까지 듣게 되었다. 남편은 레깅스 차림의 여자를 두고 저렇게 몸매를 다 드러내고 다니냐고 언짢은 목소리로 얘기했다. 아내가 뭐라고 대꾸하는지 궁금했지만 듣기도 전에 그들은 내 뒤로 처지고 있었다.
미국 인디애나주의 한 대학신문에 "여학생들이 레깅스를 입지 말아야 한다."는 글이 기고되었다. 네 명의 아들을 둔 어머니가 대학을 방문했는데 많은 여학생이 레깅스를 입고 있어 눈을 어디 둬야 할지 모르겠으니 " 남학생을 키우는 엄마를 생각해서라도 다음 쇼핑에는 레깅스 대신 청바지를 사라"라고 글을 올린 것이다.
레깅스가 운동복에서 일상복으로 넘어오면서 레깅스 착용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같은 여자가 봐도 민망하다", " 지하철 계단을 오를 때 남의 엉덩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이 불쾌하다"며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보지 않을 권리'를 주장한다.
10여 년 전 뉴욕을 방문했을 때 타임스퀘어 광장에서 요가매트를 들고 레깅스를 입고 지나가는 여성을 마주쳤지만 나 말고는 아무도 그녀에게 주목하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자신이 경험한 삶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설사 이전에 없던 것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려 해도 사회 전반에 깔린 인식의 큰 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엉덩이가 꽉 조이고 몸매가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레깅스 차림으로 거리를 활보하거나 여성의 유두가 드러나는 것은 불편해한다.
패션에 대한 논쟁은 예전부터 있어왔다. 90년대 X세대가 등장하면서 찢어진 청바지에 속옷 패션이 등장했고, 핫팬츠에 배꼽티를 입었다. 그 당시 파격적인 X세대 패션은 저녁 뉴스에서 다뤄질 정도였다. 더 거슬러 올라가 70년대 미니스커트를 입는 여성들은 줄자를 든 경찰에게 검열을 받고 무릎 위 17cm가 넘으면 풍기문란죄로 처벌을 받았다. 영국 빅토리아 시대에는 여성의 발목이 드러내면 안 되는 성적인 상징이었다. 지금 보면 상식을 벗어난 것들이 그때는 통했다.
이렇듯 패션 이슈는 옳고 그름의 명제가 아니라 사회적 합의에 따라 다르고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것이다. 탈코르셋, 탈유브라만이 옳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당연하다고 여겨졌던 것들에 질문을 던지고 주체적으로 자신의 답을 찾아 나설 수 있어야 한다. 레깅스의 착용감이 기분 좋다면, 탈브래지어의 해방감이 편안하다면 실천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패션에 대한 논란은 단순히 어떤 옷을 입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규범을 넘어서 다음 세상을 향해 가는 것이다. 성형수술, 동성애자 같은 문제도 우리 사회의 다양성으로 인정받기까지 거센 반대와 혐오를 받아왔다. 변화는 어떤 주제에 대한 사회적 찬반이 일어나면서부터 시작된다.
사회가 그어놓은 선을 먼저 넘는 사람들이 있다.
세상은 사회가 그어놓은 선을 먼저 넘어가는 사람들에 의해 나아간다.
지금 내가 입은 옷에 따가운 시선과 저항이 느껴진다면 앞장서서 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기억하다.
* 앞서가는 것은 언제나 저항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