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바꾸려고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대학 다닐 때 잠시 사귀던 남자가 있다.
돈 없는 지방 국립대생 사이에 자기 차를 몰고 다니는 남자 친구는 친구들의 부러움을 샀다.
얼굴보다 스타일, 예쁘기보다 세련됨을 추구하던 나는 그 시절의 패션니스타였고 내 자신감과 인기의 비결이 많은 부분 옷에 있다고 생각하던 시절이다.
2살 많은 남자 친구는 매너 좋고 사려 깊은 어른 같았다. 자상하고 내 옷차림에도 관심을 보였다.
그런데 처음에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좋아하더니 시간이 지날수록 내 옷에 대해 간섭을 해 왔다.
바지보다는 치마를, 플레어스커트보다 H라인 스커트 입기를 권했다.
졸업을 앞두고 남자친구가 좋아할 만한 치마 정장을 구입했다.
베이지색 재킷과 몸에 붙는 치마는 분명히 남자 친구의 취향이니 설레는 마음으로 그를 만났다. 역시 여성스러운 차림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집으로 데려다주면서 한마디 참견을 해왔다.
남들은 재킷 안에 티셔츠가 아니라 목선이 단정한 블라우스를 입는다며 다음에는 그렇게 입어보라고 말했다.
나는 블라우스와 입고 싶지 않았다. 티셔츠와 입는 것이 내 모습이었다.
앞으로도 나는 블라우스의 여성스러움보다 목 파인 티셔츠가 주는 경쾌한 섹시함을 입을 것이라 생각했다. 돈 많고 차도 있는 매력남이었지만, 결국 거기까지였다.
우리는 자신을 좋아해 주는 연인의 말을 무시하기 힘들다. 사랑에 빠졌을 때는 ‘너를 바꿔줄게’하는 소리조차 달콤하게 들린다. 자신에게 맞는 사랑스럽고 예쁜 사람으로 바꿔준다는 말이 나를 영원히 사랑하겠다는 맹세로 들린다.
연인의 사랑을 받기 위해 그에게 맞춰나간다. 사랑하는 사람으로 인해 변해가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그러나 변화는 내 안에서 시작되어야지 외부에서 강요되어서는 안 된다. 내 안에서 시작된 변화는 내 것이지만 밖에서 주입된 변화는 나다움을 잃게 만들기 때문이다.
아무리 따스하고 친절한 얼굴을 하고 있어도 내 취향과 욕망대신 자신의 욕망을 강요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영화 미 비포 유(Me Before You)는 존엄사를 다룬 사랑 이야기이지만 내게는 사랑의 본질이 무엇인지 말하는 영화로 기억된다.
성공가도를 달리던 윌은 불의의 사고로 얼굴을 제외한 전신마비가 되고 만다. 갑자기 윌의 간병인을 맡게 된 루이자는 윌과는 상반된 삶을 살아온 사람이다. 서로를 통해 새로운 세상에 눈을 두 사람은 빠르게 사랑을 키워가지만 윌은 이미 스위스에 존엄사를 신청해 둔 상태였다. 루이자의 만류에도 윌은 자신의 결정을 바꾸지 않는다. 결국 두 사람은 윌의 의사대로 함께 스위스로 떠난다.
윌이 죽고 몇 주 후 루이자는 파리의 노천카페에서 윌이 남긴 편지를 읽고 있다.
슬퍼하지 말고 자신의 인생을 살기를 당부하는 윌은 루이자에게 신고 싶은 줄무늬 타이즈를 당당히 신으라고 말한다. 카메라 앵글이 뒤로 물러나면서 멋진 원피스 아래 우스꽝스러운 검정 가로 줄무늬 타이즈를 신은 루이자의 모습이 보이며 영화는 끝난다.
줄무늬 타이즈는 루이자가 어릴 때부터 좋아했지만 남들이 이상하게 볼까 봐 신지 못한 것이다. 남들의 시선 때문에 숨겨두었던 내 욕망, 취향, 본래의 내 모습이다. 윌의 사랑이 루이자가 자신의 욕망과 본성대로 살 수 있도록 용기를 준 것이다.
루이자는 자신이 윌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윌에게 '스스로 감당하기 싫은 삶'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를 위해 삶을 선물하고 싶었지만 그가 원하는 것이 삶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그 손을 거둘 줄 안다. 비록 사랑이라 하더라도 함께 있고 싶은 자신의 욕망으로 상대방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사랑이 무엇인지 영화는 보여 준다.
진정한 사랑은 진정한 자신을 찾을 수 있도록 용기를 준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아가도록 도와주고 자신으로 살 수 있도록 격려해 준다.
그러니, 사랑한다 말하면서 내 안에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찾는 관계는 내려놓자.
아무리 달콤해도 나를 억지로 바꾸려고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