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패키지를 넘겨줍니다.
부모노릇이라는 말에는 고단함과 환희가 함께 묻어납니다. 자녀가 어릴 때와 성인이 되었을 때의 부모노릇은 차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2022년 6월 외동딸이 9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합격 소식을 듣고 저는 안도감과 기쁨을 느꼈습니다. 이제 합격했으니 발령을 기다리는 동안 고생한 몸과 마음도 쉬고 코로나로 못 갔던 여행도 다니며 즐겁고 행복하게 지내길 바랐습니다. 그러나 8월 말 면접 후 최종 합격 발표가 나자마자 10월에 바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여행을 즐기거나 쉬기도 전에 출근해야 했습니다. 어엿한 사회인으로 첫 발을 내딛는 딸이 대견하고 자랑스러웠지만, 한편으로 안타깝고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제 눈에는 아직 어린애에 불과한데 벌써 직장인이 되어 사회에 뛰어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딸은 출근한 첫날부터 야근을 했습니다. 워라밸을 지키고자 공무원이 되었는데,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저는 딸이 퇴근하면 오늘은 어떤 일이 있었는지, 무슨 일로 야근했는지, 직장 내의 상사나 동료는 어떤 사람들인지 물었습니다. 딸 또한 사회생활이 처음인지라 모든 것을 저에게 털어놓고 엄마의 조언을 바랐습니다. 저는 딸이 한숨을 쉬기만 해도 가슴이 내려앉았고 잠시도 못 쉬고 민원을 처리했다는 얘기를 들으면 마음이 아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딸이 느끼는 스트레스를 고스란히 느끼는 것도 모자라 딸에 대한 걱정과 연민까지 더해져 제가 겪는 스트레스는 두배로 커졌습니다.
마치 내가 딸의 직장에 함께 다니는 것 같았습니다. 몸은 내 직장에서 마음은 딸의 직장에서 투 잡을 뛰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도 한편으로는 내가 딸의 일상에 너무 깊이 관여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웠습니다. 정말 이러다가는 나중에 결혼한 딸 윗집의 슬리퍼 끄는 소리에도 엄마가 스트레스받는다는 말을 실감하게 될 것 같았습니다.
저는 평소에 자녀인생은 자녀의 몫이며 자녀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질 수 있도록 부모는 옆으로 비켜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딸이 낯선 환경의 새로운 스트레스에 직면하자 경계 없이 스며들고 말았습니다. 다행히 시간이 지나자 딸은 직장에 적응해 나갔고 저 또한 독립된 존재로서 딸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평소 내 생각과 다르게 행동한 경험은 오랫동안 내 마음에 남아서 딸의 인생에 지나치게 다가서지 못하도록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각자의 인생 패키지에는 스트레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트레스만 따로 빼서 인생 꾸러미를 꾸밀 수는 없습니다. 이제 딸의 스트레스는 딸에게 넘깁니다. 스트레스를 넘겨주면 모든 것을 넘겨주는 것과 같습니다. 선택권도, 선택에 대한 책임도 함께 주는 겁니다. 딸이 스스로 경험하고 부딪히며 성장할 수 있도록 놓아둡니다.
50대의 부모 노릇은 인생 패키지에서 하나도 빼지 않고 자녀에게 통째로 넘겨주는 것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생을 자신의 뜻대로 살 수 있도록 그 가능성을 넘겨주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