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학을 앞두고 학교에 갈 일이 있어 오늘 걷기는 학교까지 왕복행으로 결정되었다. 늘 걷는 길을 갈 때는 여행자의 마음은 사라지고 기계적으로 발걸음이 움직인다. 늘 옆길로 새고 싶은 마음이 드는 길이지만 또 세월이 흐른 후 이 길을 걷게 된다면 이 길은 내게 추억의 길이 되어 있을 것이다. 사실 이 길을 걸어 출근할 수 있는 기회도 1년밖에 남지 않았다. 내 교직경력 중 가장 행복한 학교였다. 첫 해를 다닐 때부터 지금까지 사소한 속상한 일들도 있었지만 내 교직 평생 가장 행복한 학교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앞으로 교직 경력이 더해지고 더해져도 이 사실에 변함이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처음 걷기 시작했을 때 40분이 걸리던 길이 25분으로 단축되어 학교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만난 반가운 동료들과 활기차게 수다를 떨며 컴퓨터를 부팅한다. 중3 우리 반 아이들 학교 배정 발표날이다. 나이스로 확인하고 배정통지서를 출력해서 사진을 찍어 개인 톡으로 보내기 전에 희망하지 않은 학교에 배정된 아이들을 확인했다. 속상해하겠구나. 아이들에게 배정통지서를 보내기를 끝내기 무섭게 전화가 한 통 걸려온다.
지난 일 년 동안 가장 많은, 가장 오랜 시간 통화를 한 학부모시다.전화 오겠구나 예상했지만 첫마디부터 기분이 상한다. 원하는 학교에 배정되지 않아 속상하신 마음은 알지만, 내가 한 일도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아닌 줄 아실 텐데 무턱대고 높은 목소리로 따지신다. 지난 한 해 동안 내가 싸늘하게 전화를 받았다면 이렇게 쉽게 전화해서 감정을 쏟아내진 못 하셨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아무렇게나 본인의 감정을 쏟아낼 대상으로 조금의 고민도 없이 나를 고르실 만큼 내가 만만하구나 싶었다. 그동안 성심성의껏 상담해왔던 것이 후회되는 순간이다. 예의를 차리고 속상한 마음을 토로하셨다면 충분히 들어드리고 위로해 드릴 수 있었을 거다. 하지만 내 마음은 이미 차갑게 식어버렸다.
집으로 걸어오는 길. 원하지 않는 학교에 배정된 아이들에게 전화해서 위로하고 가서 잘할 수 있을 거라 격려했다. 하지만 어머니와 통화를 했던 아이에게 전화를 걸기 전 잠깐 망설였다. 내 마음이 상해서 전화를 걸고 싶지 않다. 아이를 위로하기 위해 한 내 말에 어디에 꼬투리를 잡으실지도 모르고. 그래도 어머니 때문에 아이를 차별할 수는 없지. 나는 내 갈 길을 묵묵히 가기로 한다.
걸음걸음 상한 감정은 털어내며 집으로 걸어온다. 내 장점 중 하나가 상한 감정을 빨리 털어낸다는 거다. 다시 말해 나는 단순하다. 한때 <동백꽃 필 무렵>의 '나는 오늘만 살아.' 하던 향미의 대사를 자주 따라 한다. 나는 현재를 충실하게 사는 편이다. 이미 과거가 되어 버린 일로 현재에 기분 나쁠 필요는 없다.
집에서 점심을 먹고 딸내미랑 다시 집을 나섰다. 이미 1시간은 걸었으니 짧은 거리에 있는 카페에서 딸과 맛난 디저트 먹으며 오늘도 그림이나 그릴 생각이다. 평소에 복잡하던 스타벅스가 오늘은 한산하다. 내가 그림 그리고 싶은 자리도 비어 있다. 이미 나는 신난다. 빨간색 간판이 돋보이는 맥도널드가 오늘 그림의 주인공이다. 한동안 그림이 늘지 않아 답답하기도 했는데 요즘은 맘에 드는 그림이 자주 나온다. 오늘 그림도 맘에 든다. 신난다. 신난다.
딸내미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돌아오는 길도 즐겁다. 가끔씩 너무 수다스러워 집중해서 들어주기 힘들 때도 있지만 곧 중2가 되는 사춘기 딸내미가 종알대 주는 건 고마운 일이다.